중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라이브 공연을 보게 됐는데 김창완 밴드의 '꾸러기 콘서트'를 보고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노래하고 얘기하는 모습이 너무 멋져 보여서 음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 좋아했던 가수는 김창완, 해바라기, 들국화, 어떤날, 시인과 촌장, 한영애 등이었다. 주로 포크(Folk) 계열을 좋아했는데 이유는 멜로디도 좋았지만, 가사가 사랑 이야기에서 벗어나 살아가는 얘기도 하고, 가사를 만들 때 단어 선택에 유의해서 만들었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중학교 2학년 때는 음악인이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음반을 들으면서 직접 기타로 연주하기도 했다.
중학교 3학년 때 친구들과 함께 베이스 기타, 키보드, 통기타, 드럼으로 밴드를 구성한 '푸른 돛'이라는 그룹을 결성했는데 유희열은 통기타를 연주했다. 현재는 없어진 신촌의 크리스탈 소극장에서 멤버들이 돈을 조금씩 내고 티켓을 판매해 라이브 공연을 마련하며 공연도 했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공연을 하고 고등학교 2학년이 된 후는 대학입시 준비 때문에 자연스럽게 팀이 해체되었다.
유희열은 대학에 가고 싶지 않아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는데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유희열의 형이 "너는 아무래도 딴따라가 되어야 할 것 같다"라고 어머니께 음악 정규 교육을 시키는 것을 제안했고 3학년 때 가족의 독려에 힘입어 음악대학에 가기로 결심하고 시험을 준비했다. 피아노를 배운 적은 없지만 어느 정도 칠 수 있었던 유희열은 1년간 맹렬히 피아노를 연습하고 작곡 지도를 받아서 1990년 서울대학교 작곡과에 입학했다. 그를 가르치던 선생님이 서울대에 시험을 봐도 되겠다는 말에 합격도 되지 않았는데 집안에서는 잔치가 벌어졌다. 유희열의 말에 따르면 운이 좋아서였다고 한다.
유희열은 살면서 가장 열심히 살았던 때가 음대 입시를 준비했던 고3 시절이라고 한다. 연습과 작곡을 하려면 피아노가 필요했는데 어려웠던 가정 형편이라서 집에 피아노가 없었다고 한다. 아들의 꿈을 위해 어머니는 힘들게 피아노를 마련했지만, 집이 좁아서 피아노 놓을 공간이 없어서 피아노를 들여놓기 위해 유희열은 독립을 하게 됐고 힘들게 피아노를 마련했지만 바로 도착하게 되는 건 아니었고 피아노가 집에 오기까진 2~3개월이 걸렸다.
그동안 연습은 해야 해서 유희열이 기다랗게 종이로 그림 그려져 있는 종이 피아노가 있는데 종이 피아노로 손으로 위치를 외우고 계이름을 짚고 연습하면서 곡을 쓰기도 했다. 손을 외워서 할 수 있는 연습을 하다가 피아노가 집에 와서 피아노로 연습을 했는데 집에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기 시작해서 '이건 나
한테 다 채무이구나.. 내가 실패하면 완전히 집안이 어려워지겠구나..'라는 책임감 때문에 제일 열심히 살았다고 한다. 유희열이 당시 생각했던 것은 '나는 내가 배운 피아노로 어떻게든 밥을 먹고 살아야겠다.' '나는 우리 가족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그때 샀던 그 피아노가 당시 샀을 때도 중고 피아노였는데 그 피아노를 못 팔겠어서 지금은 유희열의 조카가 쓰고 있다고 한다.[3]
유희열은 자신보다 여덟 살 위인 형이 음악적인 부분에 있어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유희열이 초등학교 때 형은 경복고에 다녔는데 남성 무반주 중창단인 '글리'(glee)의 단원이었다. 유희열의 형은 노래를 잘했을 뿐 아니라 음악을 즐겨들었다. 덕분에 유희열도 자연스럽게 팝송과 가까워질 수 있었다. 또한 유희열의 친구가 되어 준 것은 FM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팝송이었다. 그 당시 라디오를 통해 흐르던 아바, ELO, 비지스, 레이프 가렛, 트윈폴리오, 양희은, 김민기 등을 포함한 아티스트들의 곡은 그에게 있어 큰 영향이 되었다.
그리고 유희열은 유재하 가요제에서 대상을 수상하고 난후, 1994년 윤정오와 함께 토이를 결성한다.[4] 그 뒤 곧바로 1집을 발매했다. 어떤 일화에 따르면, 1집 음반을 군 복무 중에 발매한 것 때문에 홍보를 할 수가 없어서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음악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인정받았다고 한다. 1집에 실린 음악을 듣고 015B의 정석원이 곡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해온데 이어 이장우, 이승환, 윤종신 등 유명 가수들이 작곡을 부탁해왔다.
1집 음반을 발매하고 해군 수병으로 입대했으며 이로 인해 토이는 잠시 활동을 중단했다. 그러다 윤정오가 유학을 떠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유희열의 1인 체제 그룹으로 바뀐다. 그사이 유희열은 군복무 중에 토이 2집 음반 준비를 했다. 휴가 나오는 틈틈이 음반 작업을 해서 유희열이 상병 때 음반이 나오게 됐는데 프로모션도 전혀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급하게 앨범을 낸 이유는 기획사인 하나음악에서 발매를 했는데, 해당 기획사에서 급하게 계획했기 때문이었다.
1996년 해군에서 제대하고 2집을 발매했다. 김연우가 메인 객원보컬이었던 2집은, 발표한 뒤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때부터 토이는 저절로 유희열의 프로젝트 밴드로서의 객원보컬 체제가 됐다.
또한 유희열은 개별적으로 작곡가 활동을 하기도 했는데, 그가 작곡가로서 제법 알려지게 된 계기는 앨범 프로듀서를 맡은 96년 4월에 발매된 윤종신 5집 앨범 《우》가 70만장 이상 판매된 후부터이다. 앨범 프로듀서의 역할은 작곡과 편곡, 디렉팅, 연주, 세션맨 관리, 연주자 선택 등 앨범에 관한한 모든 것을 책임지는 것이다.
유희열이 작곡가로서 대중적으로 크게 알려진 곡은 1996년 11월에 발표된 곡이자 유희열이 작곡, 편곡한 이문세 <조조할인>이다. 이 곡이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이와 더불어 유희열은 토이 활동과 별개로 가수 이승환의 무적밴드 건반 세션으로도 활동하였다.
유희열의 부모님은 그가 초등학교 5학년때 이혼했는데, 이혼하기 전부터 아버지는 외국에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에 관한 기억이 없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 고등학생인 형은 밤 10시에 돌아오고 한복디자이너인 어머니는 형보다 한시간 늦게 귀가했는데, 형과 어머니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음악을 듣는 유희열의 가슴엔 언제나 슬픔이 가득했다. 지금도 유희열의 한구석에 그때의 슬픔이 괴어있어 자신의 음악에 흐르는 기본적인 정서는 슬픔이라고 한다. 외롭고 쓸쓸한 가운데 스스로에게 '강해져야 한다.'라고 자신을 달랬다.
유희열은 중2부터 고1때까지 방황했었다고 한다. 가죽점퍼에 오토바이를 타고 머리를 염색하고 다녔고 학교에서 문제아 취급을 받을 정도여서 어머니가 많이 속상해했는데, 어머니가 화도 내고 매도 들었는데 와닿지 않았는데 어느 날 "나는 우리 희열이를 믿는다. 지금은 삐뚤게 가더라도 출발점이 어딘지 뒤돌아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는다"라는 어머니의 말이 와닿아서 정신을 차리게 됐다고 한다.[8][9]
2018년 2월 25일 투유 프로젝트 - 슈가맨 시즌 2에 지누(히치하이커)가 슈가맨 지누 <엉뚱한 상상>으로 오랜만에 TV 방송 무대에 나와서 유희열과 다시 만났는데 이때도 또 유희열이 일탈했던 학창 시절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말씀하길 "오토바이 타는 것까진 좋은데.. 앞바퀴만 들지 말라고..."라는 말을 해줄 정도였다고 한다. 유희열이 오토바이 타는 복장도 앞머리를 맥주로 염색해서 동그랗게 말린 머리에 길에서 마주치면 눈을 마주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10][11]
스쿨 밴드 푸른 돛 활동
롤러코스터의 전 멤버 지누(히치하이커)가 중학교 때부터 스쿨밴드를 했는데 유희열을 그때 처음 만났다고 한다. 그때 만난 사람들이 신석철, 김세황, 유희열이었다고 한다. 그때 당시 지누의 밴드 팀 이름은 하이에나였고 유희열 밴드 팀의 이름은 푸른 돛이었다고 한다.
히치하이커가 가요계에 처음 발을 딛을 수 있게 해준 사람이 유희열의 도움 덕분 때문이라고 한다. 유희열과 같이 군대 동기로 생활했는데 지누는 록 음악만 알고 기타만 쳤기 때문에 코드 진행이라든지 이런 팝적인 거에 대해선 너무 몰랐는데 유희열이 많은 코드 이론을 많이 알려주었다고 한다. 유희열이 코드 하나를 알려주면 그 코드로 다음날 30곡을 써서 유희열도 놀랐다고 한다. 지누는 음악을 몸으로 알았다면 머리로 하는 걸 알게 된 거 같다고 한다. 제대하면 군대 안에서 만들었던 곡을 가지고 작곡가로 활동을 하고 싶었는데 유희열이 이승환에게 지누를 소개시켜 줬는데 이승환이 지누의 곡을 듣고 너무 만족해서 지누에게 가수로 계약을 하자고 했다고 한다.[12]
15살 첫 작곡가 데뷔
유희열은 이미 열다섯 살 때에 곡을 썼다. 그때는 멋모르고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기타를 칠 줄 알았기에 해 보았던 것이라고 한다. 그 곡은 가수였던 유희열의 사촌형인 김형용의 앨범에 실리게 되었다. 유희열은 "곡이 좋아서 라기 보다 돈이 안 드니깐 실었던 것 같아요."라고 웃으며 말했다. 유희열이 라디오 천국을 진행할 때도 게스트로 출연한 윤상과 함께 언급했다. 유희열이 첫 작곡가 데뷔를 한 때는 중학교 때였다고 한다. 유희열이 말하길 "중학교 때 작곡가로 데뷔를 한 곡이 있어요." 라고 말했지만 어릴 때 만든 곡이라 쑥스러운지 가수와 곡명은 얘기하지 않았지만 그 곡은 1988년도에 발매된 김형용의 <꿈에 잠기어>이다. (유희열의 라디오 천국, 2008년 9월 24일)
고등학교 때 만든 곡을 시작으로 본격 작곡 활동
1991년 대학교 1학년 때 고등학교 2학년 때 만들었던 곡 〈햇빛 비추는 날〉이 김장훈의 1집에 실렸다. 김광석이 진행했던 라디오 프로그램인 《밤의 창가에서》 1992년 11월 20일 이날 방송분에 게스트로 출연한 유희열이 고등학교 2학년 때 만든 곡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익숙한 그 집 앞
1999년 자서전의 성격을 띤 삽화집 《익숙한 그 집 앞》과 함께 연주곡 음반도 발표했다. 《익숙한 그 집 앞》은 출중한 문필의 심오한 철학도 뛰어난 터치의 놀라운 그림도 없었지만 어린시절, 친구, 가족, 사랑, 음악, 외로움 등 누구나 커 가면서 느낄 수 있는 것에 대한 공감을 자아냈다.
처음엔 삽화집을 낼 계획이 아니었다고 한다. 유희열의 평생 소원이 <연주곡집>을 내는 것이었는데 보통 연주곡은 제목만으로 곡 전체의 분위기를 상상하게 되는 게 있어서 그 점이 아쉬워 약간의 설명과 삽화를 넣은 속지를 계획했고 그것이 소책자가 되고 결국 책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삽화집을 위한 글과 그림 작업을 시작했고, 앨범 작업은 마지막으로 미뤄줬는데 주객이 전도된 까닭에 앨범에 더 충실하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삽화집을 만든 건 잘한 일이었다고 한다.
연습장에 끄적거리는 정도였고 일기조차 쓰지 않았는데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글을 쓰고, 의무 교육을 제외하고는 그리기에 대한 교육을 받지 않아서 그림을 그린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즐거운 작업이었다고 한다. 글을 먼저 쓰고 그림을 그렸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진 않았고 하루에 그림을 여섯 장 그리기도 했다. 단지 어려운 점은 글에서 느껴지는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일이었는데 어떻게 그릴까 하루 종일 생각하는 건 어려웠다.
토이라는 이름보다 유희열이라는 이름을 단 연주곡집은 작곡가로서 오래된 꿈이었다. 앨범 한장은 한편의 영화와 같아서 곡 하나 하나보다는 전체적인 스토리가 담겨 있어야 하는데 《익숙한 그 집 앞》연주곡집은 잘 때 들을 수 있는 곡으로 구성했다고 한다. 평소 잠자리에 들기 전 항상 음악을 듣곤 하는데, 한 음반을 듣다보면 1번과 2번 트랙은 좋은데 그 이후론 거슬릴 때가 있는데 그런 점을 고려해서 아무 생각없이 들으면서 잘 수 있는 편안한 음악을 만들기로 했다.
하지만 앨범은 때론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고, 항상 아쉬움을 남기는데 그의 의도대로 실현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뒤로 갈수록 전자악기를 쓰거나 테크노 비트를 가미해서 애초의 생각과는 다르게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 이유는 자신의 욕심 때문이었다고 한다. 자신이 아직 젊어서 끝까지 밀어 부치는 힘이 부족하고, 보다 많은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욕심 그리고 연륜 부족이었다고 한다. 연주곡이 8곡, 노래 2곡으로 구성했고 연주곡의 경우는 피아노 연주곡, 피아노와 다른 현악기의 연주곡, 피아노와 멜로디언의 연주곡, 피아노와 테크노적인 연주곡 등 여러 가지를 시도했지만 발매 후 한가지 아쉬운 건 한가지 색으로 음악을 하지 못했던 게 아쉽다고 한다. 조금 다양하게 시도하려 욕심을 부렸던 것이 앨범 발매 후에는 조금 아쉬운 부분으로 남았다고 한다. 계속 같은 톤으로 음악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이번에 알게 됐다고 한다. 앨범 작업은 되도록 소박하고 솔로를 배제하고 튀지 않는 방향으로 진행시켰다고 한다. 연주면에서는 최소한 표현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 미니멀리즘 적으로 표현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게 세계음악의 현 추세였다고 한다. 음을 최대한으로 아껴썼으며 많이 절제하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또한 유희열이 《익숙한 그 집 앞》삽화집을 낸 다른 이유도 있는데 자신이 하고자하는 음악 활동의 폭을 넓히기 위한 밑작업이라고 한다. 앞으로 하고 싶은 것을 할 것이라고 예고하는 것도 있었다. 아직 하고 싶은 음악이 많은 만큼 한 가지 이미지로 자신을 고립시키고 싶지 않다고 한다.
들국화
들국화의 데뷔 앨범이 나오기 전부터 들국화는 유명했는데 "우리나라에 비틀즈만큼 잘 하는 팀이 있다."라는 얘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유희열이 중학생 시절 친구들과 함께 들국화를 보려고 이태원의 너무 무서웠던 라이브 극장까지 찾아가서 라이브를 듣고 나서 감동했다고 한다. 들국화는 데뷔 앨범을 발표하고 기획사 차원에서 대대적인 홍보를 하는 형식이 아니라 음반을 내기도 전에 공연부터 활동을 했다. 데뷔 앨범이 발표되기 전 2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장기 공연을 해서 팬들을 확보해나갔다. 앨범이 나오기도 전이였는데 공연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노래를 다 외울 정도로 들국화 음악에 빠졌다고 한다. 당시 피카디리극장 옆에 에스엠이라는 까페가 있었는데 그땐 뮤직비디오가 귀했고 볼 수 있는 장소도 없었는데 이 에스엠 까페에 가면 외국 뮤직비디오를 틀어줬었다고 한다. 특히 레드 제플린, 딥 퍼플 뮤직 비디오를 틀어줬는데 들국화는 이곳에서 간간히 공연도 했었다고 한다. 그러다 들국화는 에스엠이라는 까페에서 5일동안 첫 단독 콘서트를 가졌다.
들국화 데뷔 앨범이 발표되면서 록, 포크 록, 블루스, 로큰롤 다양한 스타일의 곡을 담고 있었고 데뷔 앨범의 수록곡 <행진>, <그것만이 내세상>, <사랑일뿐이야>, <매일 그대와>, <아침이 밝아올때까지> 등 앨범의 거의 모든 곡들이 모든 사람들이 외울 정도로 사랑을 받았고 들국화의 데뷔 앨범을 시작으로 언더그라운드라는 이름을 대중들에게 알리게 된 그룹이다. 유희열이 그때 당시의 사람들은 '언더그라운드가 뭐야?' 라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들국화는 앨범을 내기 전에 공연장에서 계속 라이브 무대를 가졌었다. 그래서 들국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미 노래를 다 알고 있었다. 유희열 또한 지금은 없어진 신촌의 옥상 크리스탈 백화점의 옥상 무대에서 전인권이 <제발>을 불렀는데 유희열은 '저 노래는 뭔가.. 음반엔 없는데..' 하고 막 떨리는 마음으로 들었는데 나중에 들국화 2집 앨범을 듣다보니 <제발>이 수록되어 있어서 유희열은 너무 반가웠다고 한다. 이렇게 들국화는 모든 곡들을 앨범을 내기 전에 공연장에서 발표했다. 국내 라이브 역사 한획을 그은 들국화 라이브 앨범은 서울 스튜디오에 A스튜디오라는 굉장히 큰 스튜디오가 있는데 그 스튜디오에서 공연 실황 녹음을 했는데 나중에 유희열은 '서울 스튜디오(전설적인 엔지니어이자 사장인 최세형)에서 녹음을 하면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했는데 나중에 김장훈의 앨범으로 처음으로 서울 스튜디오에 갔는데 '들국화가 녹음한 곳이 여기구나..' 란 생각에 그때 눈물이 날 것 같았다고 한다. 유희열의 음악에 들국화와 어떤날이 영향이 컸지만 들국화 공연을 보면서 음악을 시작하고 싶어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들국화의 전국 순회공연, 더블 라이브 앨범이 굉장히 성공을 거두었는데 들국화의 성공에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이 '그래 공연이다. 라이브다. '라고 고무됐고 소극장 공연에 붐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대학로에서 지금처럼 어떠한 가수들이 앨범 발표를 하고 공연을 하게 됐던데 가장 큰 기여를 했던 사람들이 들국화였다. 그때 당시엔 어떤 홍보 차원에서의 공연은 상상치 못했던 시절이었고 다들 라이브라기 보단 리사이틀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들국화는 지금처럼 소극장 공연장을 가서 같이 호흡을 할 수 있게 됐던 그런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13][14]
조동익
유희열은 어떤날의 조동익을 존경했다고 한다. 유희열은 녹음실에서 제일 막내로 청소를 하고 녹음실 정리를 하고 그랬는데 그때 당시에 조동익은 '음악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한마디도 안 했었다고 한다. '야 음악은 여기서, 음악 정신은' 이런 음악적인 얘길 전혀 안 하셔서 더 멋있었다고 한다. 너무 썰렁한 얘기나 술이나 한잔 마실까? 같은 그런 얘기만 항상 하다가 녹음실만 들어가면 사람이 확 바뀌어서 너무 멋있게 바뀌었다고 한다. 한번은 잊혀지지 않는 모습이 조동익이 어떤 드럼 소리를 만들어야 하는 게 있었는데 유희열은 본인 같으면 그냥 간단하게 어디서 따와서 하던지 간단하게 찾았을텐데 조동익은 3일내내 녹음실에서 직접 소리를 고르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찾다가 녹음실에서 나와 담배를 피면서 "아.. 그냥 드럼 쳐야겠다." 라고 말을 하는 모습을 보고 유희열은 '아.. 음악은 저렇게 뭔가 이렇게 수를 놓듯이 하나하나 떠서 하는 거구나..'라는 생각을 해주게 했고 지금도 쉽게쉽게 만들어낼 때 반성하게 하는 분이라고 한다.
팻 메스니
팻 메스니는 미국의 재즈 작곡가이자, 기타리스트이다.
유희열은 동시대를 살면서 팻 메스니의 음악을 모르고 지나친다라는 건 굉장히 슬픈 일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유희열이 좋아하는 뮤지션이라고 한다.
유희열은 팻 메스니를 음악을 위한, 진정한 아름답고, 음들의 향연, 리듬의 향연, 감정의 달리기, 긴 여정.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표정들을 노랫말과 어떠한 멜로디에 싣는다기보다도 호흡으로 이렇게 달려나가는 너무나 멋진 뮤지션이고, 또한 너무나 멋진 어법을 가지고 있는 뮤지션이라고 한다. 유희열이 Pat Metheny 오마주 격으로 만들어 본 곡 <라디오 천국 (HomagePat Metheny)>은 1999년에 발매한 《유희열 삽화집 - 익숙한 그 집 앞》에 수록되었다.
제 4회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대상 수상자 유희열과 스튜디오 엔지니어 윤정오가 결성한 팀 '토이'의 첫 앨범으로 토이 감성의 시작점이 된 앨범. 연주부터 녹음까지 모두 두 사람의 손을 거쳤다. 이들의 데뷔음반에는 조동익, 이병우, 손진태, 김광민 등 정상급 음악가들이 앨범에 참여했고 장필순, 조규찬, 박상균, 김정호가 객원가수로 함께 했다.
토이는 2집부터 유희열의 원맨밴드 형식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이번 앨범부터 토이가 가진 고급스럽고도 세련된 색깔이 분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펑키, 재즈, 쿨랩, 포크, 발라드까지 여러 가지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시도를 보여주면서도 소박함을 잃지 않는 서정적인 모습까지 함께 보여주고 있다. 김연우, 조규찬, 윤종신, 조원선, 이장우등의 뮤지션들이 목소리로 힘을 보탰다.
토이의 세 번째 앨범 'present'는 제목 그대로 음악을 사랑하는 모든 이에게 그가 주는 선물 같은 음반으로 앨범 하나가 전체적인 스토리로 이어져있다. 가난한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열심히 일을 하고 선물을 마련하지만 결국 그녀는 그의 곁을 떠나고 남겨진 사람은 그녀를 추억한다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아주 평범하면서도 슬픈 이야기를 토이만이 할 수 있는 감성 가득한 사운드에 담아냈다.
함춘호, 박영용, 김원용, 신현권, 이태윤, 정원영 등 한국의 내놓으라 하는 음악가들이 세션으로 참여했고 이승환, 신해철, 조규찬, 지누(히치하이커), 변재원 등 또한 최고의 가수들이 객원 보컬로 참여했으며, 영국의 애비로드 스튜디오에서 런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작업한 앨범으로 그레미상을 세 차례나 수상한 프로듀서 그레고리 스콰이어가 프로듀싱 했다.
뮤지션 유희열의 고뇌와 열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음반.
토이의 4집 <Night in Seoul>은 어쿠스틱 발라드에 머무르지 않고 진보하는 유희열의 실험정신과 그것을 대중적이면서도 세련되게 풀어나가는 방식을 엿볼 수 있는 음반이다. 테크노, 포크, 재즈, 뉴웨이브 등의 다양한 장르가 함께 어우러져있고 당시 생소했던 컴퓨터 음악작업을 적극 활용하면서 청자들에게 익숙하면서도 생소한 질감의 감정을 선사했다.
당시 유희열은 '큰 부담을 갖지 않고 하고 싶은 음악을 마음껏 펼쳐본 앨범'이라고 한 인터뷰에서 밝혔다.
토이의 다섯 번째 앨범 '페르마타(Fermata)'는 '잠시 쉼'이라는 음악용어에서 타이틀을 가져왔다. 이 작품은 유희열이 가진 감성에 라틴 등 월드뮤직 제 3세계의 색을 끼얹은 완성도 높은 음반으로, 그동안 모아뒀던 음악적 아이디어와 그가 매료된 이국적 사운드를 지혜롭게 풀어낸 앨범이기도 하다. 객원 가수로는 이승환, 김연우, 윤상, 조트리오 등 음악적 지인들이 참여했다.
2007년 토이 6집 《Thank You》 Archived 2015년 12월 23일 - 웨이백 머신 : 유희열의 길고 긴 여행, 수집, 시도 끝에 발견한 음악적 도약, 토이 [Thank You]
유희열의 프로젝트 그룹 'TOY'의 여섯 번째 앨범이다.
6년 6개월 만에 발표하는 이 앨범에는 인트로와 아웃트로를 포함한 총 15개의 트랙이 수록되어 있다.
6집 작업을 하면서 6번을 엎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만큼 이번 앨범의 트랙들은 그간 유희열이 보여주었던 말랑한 감성 이외에도 독특하고 색다른 시도들로 가득하다.
일렉트로니카 장르의 전면적인 사용과 80년대 뉴웨이브 스타일로의 회귀, 그리고 그의 장기인 애절하고 감성적인 발라드가 뒤섞여있는 이 앨범에는 루시드 폴, 이지형, 윤하, 성시경, 김민규 등의 쟁쟁한 뮤지션들이 객원보컬로 참여하여 그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2014년 토이 7집 《Da Capo》 Archived 2015년 12월 23일 - 웨이백 머신 : 7년과 맞바꾼 고민, 집착, 기다림. 그리고 다시 찾는 음악의 이유와 가치
유희열의 원맨 프로젝트 토이의 정규 7집 앨범 [Da Capo]가 무려 7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세상에 나왔다. [Da Capo]에는 토이에 최적화된 익숙한, 동시에 낯선 사운드가 적절히 안배돼 담긴 음반으로, 이번 앨범엔 김동률, 성시경, 선우정아, 권진아, 이수현(악동뮤지션), 김예림, 크러쉬, 다이나믹 듀오, 빈지노, 자이언티 등 가요계를 주도하는 뮤지션들은 객원보컬로 참여했다.
80년대 작법에서 볼 수 있는 팝적의 멜로디와 퓨전 재즈의 섹션, 발라드의 기조를 품은 안정된 코드 진행에 더해진 과감한 전조, 일렉트로닉적 프로그래밍과 모던록의 어프로치까지 기존 토이를 수식하는 음악적 방향을 여전히 지니고 있는 가운데, 복고풍 유러피언 팝의 육감적인 사운드, 소울 음악의 기조를 띤 스트링과 리듬감, 임팩트 있는 랩과 가공되지 않은 청아한 목소리 등 이전의 토이와는 차별된 경향 역시 유기적으로 혼합된 느낌을 준다. 이번 앨범에는 같은 소속사인 페퍼톤스의 멤버 신재평의 주도적인 편곡과 프로그래밍 참여로 과거에 비해 좀 더 과감한 소리들을 담았다.
(페퍼톤스의 신재평이 Co-Produced로 참여한 곡은 총 5곡으로 <아무도 모른다>, <Reset>, <인생은 아름다워>, <우리>, <취한 밤>이다.)
토이 음악
유희열은 토이 음악의 기조는 편안함과 따뜻함이라고 한다. 기승전결이 뚜렷하지 않아 귀에 쏙 들어오지 않지만 질리지 않는 음악을 만들어 나갈 생각이고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보다 공감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고 싶은 것이 유희열의 소망이다. 또한 토이만의 색깔을 가진 음악을 만들어 토이라는 이름만 보고도 앨범을 살 수 있는 그런 음악
토이 'Thank You' 발매를 끝으로 가수 활동을 은퇴하려고 했다.[15] 그동안 사랑해준 팬들에게 고맙다는 뜻으로 앨범 타이틀을 "Thank You"라고 짓고 Thank You를 마지막으로 가족들과 미국으로 유학을 갈 예정이었는데 주위 동료들의 설득과 팬들의 만류, 미국에서의 적응 등이 마음에 걸려 은퇴 생각을 돌렸다. 은퇴를 결심하고 그동안 사랑해준 팬들에게 보답하는 이벤트 앨범 차원으로 만들었는데 은퇴 생각을 돌리고 6집 정규 앨범이 되면서 컨셉이나 퀄리티를 완전히 다 바꾸게 되었다.[16]
토이 6집 《Thank You》앨범을 발매하고 유희열이 페퍼톤스신재평과 함께 술을 먹다가 신재평에게 "음악을 안 해야 하는 게 아닌가?" 라고 얘길 했었는데 신재평 이 버럭 화를 냈었다고 한다. 신재평은 좋아하는 뮤지션인데 너무 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베스트 앨범을 내고 끝내겠다고 해서 속상했다고 한다.
유희열은 토이 7집 《Da Capo》 앨범을 내기 위해서 "내가 음악에 임하는 태도에 대한 불안감이 너무 컸기 때문에 어떻게든 예전만큼의 작업 시간 총량을 채워내려고 했다." 고 말했다.
유희열이 20대 때에는 피아노 앞에 앉아서 사흘 밤을 새울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나이를 점점 먹으니깐 힘들어지는 자신의 태도가 너무 안 좋게 느껴졌는데, "이렇게 해서 음악을 발표하는 게 음악이 좋건 나쁘건 간에 사람들이 뻔히 다 알 텐데 시간을 이 정도밖에 투자를 안 했는데 이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라고 자신의 생각을 토로했다. 지금 나이를 먹고 어느 정도 시선이 좀 더 견고해졌다 하더라도 무슨 대가처럼 툭 하고 앨범을 못 냈겠다고 한다. 그래서 그 시간을 채우고 싶었는데 이렇게까지 마음 찾는 시간이 정확히 7년, 아주 제대로 돌아왔을 땐 2년 정도의 시간이 걸리니깐 마치 기초 체력이 없다가 무엇인가 다져지면서 약간 힘이 생긴다는 기분이 녹음하는 마지막 한 달에 들었다고 한다. 그때는 밤을 새는 게 마치 20대 후반 4집, 5집 했을 때 기분이 들어서 기뻤다고 한다. 그런 고통, 힘듦. 자신을 학대하는 고통이 다시 자신을 살아나게 했다고 한다.
토이 앨범의 객원가수
객원 가수를 고를 때 모르는 분을 고를 땐 색깔을 고르는 게 아니고 이 사람이 이 노래를 얼마만큼 소화해낼 수 있는 사람인가, 음역대는 어느 정도인가를 본다고 한다. 토이 앨범엔 여러 곡이 있다 보니깐 우선적으로 그 곡에 맞춰서 생각을 한다고 한다. 만약에 어떤 곡을 썼는데 이 곡은 약간은 남성적인 느낌이 들어야 된다고 하면 그런 사람을 찾는다고 한다. 근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자친구를 찾는 것처럼 고르게 되는 것 같다고 한다. 사람을 먼저 본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이 좋아하는 모습을 가진 사람인지 아닌지를 먼저 보고 고른다고 한다.
절제의 미학, 토이 최고 보컬 김연우
지금까지 만나본 가수 중에 노래는 최고죠. 제가 늘 하는 얘기가 김연우 씨가 조금 찡그린다면 그건 음역이 아주 높은 거고요.
그리고 조금 더 몸을 뒤로 젖힌다면 일반인들은 절대 부를 수 없는 노래를 뜻하는 거예요. 저도 기사를 통해 보긴 했었는데(MBC나는 가수다) 김연우씨가 감정이나 여러 가지가 좀 딱딱하게 노래를 부른다 그런 평가가 있더라고요.
15년 가까이 제가 옆에서 지켜봐온 사람으로선 절제의 미학이라는 게 정말 있는데 그런 어떤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는 그런 것들이 많은 점수를 못 받나 봐요. 제가 연우 씨에게 항상 하는 얘기지만 제가 만나봤던 가수 중에 너는 최고였다. 저는 김연우 씨를 많이 지지하는 바입니다.
김연우 씨가 발라드를 주로 많이 했기 때문에 그런 느낌으로만 알고 계신 분이 많아요. 하지만 김연우 씨의 가장 큰 매력은요.
사실 리듬감에 있습니다. 노래에 리듬감이 없으면 그렇게 차분하고 감성을 절제했을 때 그런 느낌을 받을 수가 없어요. 그루브를 얼마나 잘 타는데요.[17](2011.05.12 KBS 쿨FM유희열의 라디오 천국)
유희열이 노래하고 싶은 목소리, 김형중
유희열이 "김형중은 내가 노래하고 싶은 목소리, 저게 나였으면 하는 목소리" 라고 한다.[18][19]
MBC 강변가요제는 본선 무대에 10팀 올라오게 되는데, 아마추어로 노래를 가지고 가기 때문에 편곡은 전문 작곡가 다섯명이 한명당 두팀씩 맡아 멘토 역할을 해서 편곡을 해주고, 무대에서 해야 할 것 등도 말해준다고 한다. 당시 유희열은 심사위원 중에서 나이가 제일 어려서 막내로 선배 작곡가들이 먼저 고르고 난 남은 나머지 두곡을 유희열이 맡에서 편곡을 했다고 한다. 그중 한명이 대상을 받았던 배연희의 〈소중한 너에게〉, 이수근이 속했던 팀 <동대문 남대문> 이었다고 한다.
음악 프로듀서, 작사 작곡, 편곡
유희열은 토이 앨범이 아닌 다른 가수에게 주는 곡은 좀 다른 관점에서 작곡을 한다고 한다. 그 곡을 부를 가수의 색깔을 중시하고 그 사람과 가장 잘 어울리는 음악을 만들어 앨범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것. 또한 상업적인 면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곡을 만들어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한다.
음악 작업 스타일
곡을 쓰기 전에 그림 하나를 떠올린다. 예를 들면 한 소년이 달려가는 모습이나, 뜨거운 햇살 아래 누군가를 기다리는, 지루하지만 설레는 어느 시간들.. 이런 장면을 떠올린다고 한다.
음악 스펙트럼
유희열 음악의 가장 큰 특징은 한국 대중가요에서 현악기가 가요 안에서 쓰이는 방식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한 대표 뮤지션이라는 점이다. 유희열과 같은 평가를 받는 뮤지션으로는 김동률, 정재형이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김동률과 정재형은 스케일이 크고 화려한 쪽인 반면 유희열은 현악기 자체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효과나 사운드를 잘 이용하는 쪽이라는 것이다. 현악기를 가요에 잘 접목시킨 유희열, 김동률, 정재형으로 인해 한국 대중음악 앨범 자켓에 'Strings Arranged by'라는 항목이 생기게 되었고, 한국 대중음악에서 하나의 독보적인 분야가 되었다.[20][21]
유희열은 'Classical한 느낌이 드는 음악'이란 평가에 대해서 일부러 클래식을 배웠으니깐 클래식 냄새가 나야겠다, 그런 건 아니고 조금 더 섬세해서 그런 걸 거라고 한다. 아무래도 교육을 좀 받았으니깐. 하지만 교육 받은 걸 대중음악 할 때는 거의 안 쓰려고 한다고 한다. 대중음악과 클래식에 경계를 두는 건 아닌데, 아마 자신도 모르게 조금은 나올 거 같다고 한다. 조금 더 섬세해지고. 아무래도 자신이 클래식을 배운 걸 아니깐 감정적인 것보다 분석적이 되기 때문에 들으시는 분들이 그렇게 느끼시는 것 같다면서 자신이 스트링을 많이 쓰니깐 그래서 그렇게 평가해주시는 거 같다고 한다.
음악 장르 스펙트럼 또한 다양한 뮤지션으로 발라드, 재즈 퓨전, 재즈 팝, 애시드 재즈, 전자 음악, 일렉트로니카, 테크노, 신스팝, 포크 록, 모던 록, 팝 록, 컬리지 록, 소프트 록, 어쿠스틱, 블루스, R&B, 이지 리스닝, 뉴에이지 등 여러 가지 장르를 넘나들기도 한다. 대중음악 평론가 임진모 말에 의하면, 임진모가 예전에 이승환 인터뷰를 했을 때 유희열(토이)에 대한 얘기가 나왔는데, 이승환이 유희열 음악에 대해서 말하길 "유희열은 A부터 ~ Z까지 다 있는 사람으로. 락, 팝, 댄스, 써커스 음악, 국악까지 다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 그만큼 폭넓은 음악적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 뮤지션이라고 말한 바 있다. (배철수의 음악캠프, 2016년 1월 28일)
영화 음악
무보수로 학생들 단편작품을 훈련삼아 해본 적이 있다고 한다. 유희열이 만든 단편영화 음악 중 영화《봄산에》OST Main Theme 음악 <Intermission>이 2001년에 발매한 토이 라이브 앨범《Live Toy》에 수록되었다.
영화음악 섭외가 들어와서 유명 감독님들과도 몇번 만난 적이 있는데 폐를 끼칠까봐 무서워서 못했다고 한다. 음악만 던지시면 된다고 말씀들 하셨지만 자신에겐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싱크도 맞춰야 되고 여러 가지 생각할 게 많아서 훈련을 하고 맡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자신 혼자 하는 거면 자기 혼자 다 책임지고 그걸로 그만이지만, 스태프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자신 때문에 다른 일까지 차질이 생길까봐 섣불리 건드리지 못하겠다고 한다. 좀 더 경험을 쌓고 자신이 있을 때 할 생각이라고 한다.
일렉트로닉 라운지 음악 대중화 기여
2002년 일렉트로닉컴필레이션 앨범 유희열이 초대하는 새로운 음악세계 《A Walk Around The Corner (Project Album : Photo + Music)》
일렉트로니카 뮤지션들을 소개하는 프로젝트를 통해 당시 입지를 다져가고 있던 한국의 인디 일렉트로니카 뮤지션들과 공동작업을 하였다.[22]
이 앨범은 평소 친분이 있던 유희열과 사진작가 안성진이 "대한민국의 문화혁명을 일으키자."라는 기획으로 의기투합하여 " 안성진은 사진 작업을 하고, 유희열은 음악 프로듀서가 되어 멋진 콜라보레이션 작업을 하자."라는 기획으로 만든 앨범이다. 지금은 콜라보레이션이 흔한 단어가 됐지만, 이 기획을 할 당시엔 콜라보레이션이란 개념이 없던 때였다. 특히 음악과 다른 장르가 만나서 색다른 결과물을 낸다는 것이 굉장히 흥미롭고, 실험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했고, 원래는 사진작가, 디자이너, 소설가 이런 분들과 음악을 같이 계속해서 연계하는 시리즈물 프로젝트 작업을 하려고 했으나 하다 보니 쉽지 않은 일이라서 이 첫 번째 콜라보레이션 작업을 끝으로 서로 다른 장르의 콜라보레이션을 하는 작업은 끝났다.
앨범 구성으로는 처음으로 일렉트로닉 뮤지션들이 모여서 클래지콰이도 처음으로 이 프로젝트 앨범에 곡을 발표했고, 세인트 바이너리(김택수), 롤러코스터, 전자맨 등 수많은 일렉트로닉 뮤지션들이 모여서 이 앨범에 참여했다.
그때 당시 앨범을 발매한 후 굉장히 재밌었던 건 어떤 평론가들이 "이게 무슨 테크노냐?"라는 얘기가 있었던 거 같다고 한다. 아마 그분은 테크노 하면 클럽에서 나오는 아주 춤추는 용도의 음악만 생각하셨던 것 같다고 한다. 일렉트로닉은 장르가 워낙 방대해서 거의 그런 기계적인 음이 없더라도 개념적으로 일렉트로닉한 미디작업을 통해 작업한 건 지금은 다 뭉뚱거려 일렉트로닉이라고 많이 얘길 한다고 한다.
유희열도 직접 참여한 곡이 있는데 <Silly Love Song> 아주 단순한 코드고 모든 사운드들이 다 컴퓨터 음으로 만든 음악이라고 한다. 지금도 가끔 본인이 들으면 귀여운 음악이라고 한다.
루시드 폴, 안테나, 음악인으로서의 전업
루시드 폴이 2001년 1집 《Lucid Fall》을 낸 이후 2005년 2집《오, 사랑》앨범이 나오는 4년의 기간 사이에 음악계에 '루시드 폴이 음악을 관둘 거다'라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루시드 폴은 사실 전 소속사와 분쟁이 있었던 차에 유희열이 일렉트로니카 컴플레이션 앨범《A Walk Around The Corner (프로듀서:유희열)》을 만드는데 루시드 폴에게 한 곡 참여하라고 해서 당시 토이뮤직(안테나)을 알게 되고 루시드 폴이 소속사 문제로 굉장히 힘들어 하니깐 유희열이 루시드 폴에게 "그럼 우리와 하자." 고 얘기했다고 한다. 루시드 폴은 회사와의 계약에 학을 뗀 상태였기에 유학을 가겠다는 마음을 정하고(금전적으로 여유가 많아서 유학을 가려 했던 것이 아니라 유럽은 원래 박사과정 학생이 연구원 신분이기 때문에 월급과 모든 걸 제공해주는 조건이라 나쁠 거 없으니깐 가려 한 거였다고 한다.) '다 싫다. 혼자 음악 하겠다. 혼자 판(앨범) 팔아서 클럽에서 판 만들어서 판 팔고 음악하겠다. 근데 다른 직장은 하나 있어야겠지' 이렇게 생각하고 마음을 굳힌 상태로 부산에 있을 때였는데 유희열이 정동인 대표에게(안테나 전 대표) 부탁해서 부산에 세 번이나 내려와서 설득했는데 마지막으로 했던 얘기가 "유학 가고 한 장 앨범 네가 내고 싶을 때 내라. 홍보도 뭐고 알아서 할 테니깐 앨범 내기만 해라. 이래도 싫은가?" 란 얘기에 루시드 폴은 "하겠습니다."라고 얘기하고 계약을 하고 유학을 갔고. 그 뒤엔 안테나가 깔끔하게 루시드 폴의 법정 분쟁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유희열이 루시드 폴을 그렇게까지 해서 함께 하고 싶다는 것보다는 유희열이 루시드 폴을 미선이 때부터 팬의 입장으로서 후배이긴 하지만 나름 존경했다고 한다. "이 사람이 음악을 안 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음악을 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그 후 루시드 폴은 유학 중에 방학 때마다 한국에 잠깐 들어와서 음반 작업을 하고 작은 콘서트를 열고 또 학업을 이어나갔었다. 그렇게 학업을 다 마치고 잠깐 방학 때 들어와서 둘이서 술을 먹었는데 루시드 폴이 그때 미국의 제약회사에서 루시드 폴을 굉장히 좋은 조건으로 스카웃 해서 루시드 폴이 십몇 년간 공부해온 게 꽃을 피우는 시기였다고 한다. 유희열이 "공부 마친 거 축하한다."고 하니깐 루시드 폴이 "형 나 들어와서 음악 할까요?" 라고 말해서 유희열이 깜짝 놀랐다고 한다. 유희열이 "무슨 말이냐 공부한 것도 아깝고, 지금처럼 거기서 계속 일도 하면서 사이사이 들어와서 음악하면 되지 않을까?" 라고 했더니 루시드 폴이 "형 사람의 몸은 약으로 고칠 수 있지만, 사람의 마음은 음악으로 고칠 수 있어요." 그러면서 음악 하고 싶다고 해서 유희열은 놀랬는데 취기도 있어서 "어차피 네 인생이니깐 네가 하고 싶은 대로 결정을 해라." 고 했다고 한다. 그러고 루시드 폴은 한국에 들어와서 음악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유희열이 가끔 루시드 폴에게 "그때 그 판단을 후회하지 않니?" 라고 물으면 루시드 폴은 "절대 후회하지 않고 제일 잘한 판단 중의 하나일 거라고." 얘기한다고 한다.[23][24][25]
정재형 방송 활동
예전엔 예민했던 정재형에게 방송은 힘들었다고 한다. 유학 생활로 방송 활동을 꾸준하게 안 했었고 앨범 프로모션도 한달로 계획해서 한국에 들어가고 그랬어서 방송에 익숙하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아 이러다 부러지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다고 한다. 안 하는 이유도 너무 많아지고 그러다보니 정말 할 게 없고 그러면서도 막상 바쁜 '이게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자신한테 '왜 자신이 없어?' 이런 얘기들을 자신에게 했다고 한다. 유희열이 고민하고 힘들어하는 정재형에게 "내가 생각할 때 위트와 남자의 유머는 자신감이다." 라고 말해줬는데 정재형에게 그 말이 되게 기억에 남았다고 한다. '아 그래. 그렇게 긴장하고 그러면 안 되겠다. 이러면 정말 깐깐한 음악인이 되겠구나.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점점 방송이란 것도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뭘 하겠나. 뭐 어때 유머러스하고 음악은 진중할지언정.' 이렇게 유연함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다고 한다. 유희열의 조언에 생각과 마음을 점점 오픈 하니깐 암울하고 우울한 시기를 잘 극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2011년 《무한도전 서해안고속도로 가요제》 방송 출연을 계기로 2012년 SBS 《정재형 이효리의 유&아이》, 2012년 KBS2《불후의 명곡 - 전설을 노래하다》, 2014년 올리브tv 《정재형의 프랑스 가정식》, 2015년 tvN 《젠틀맨리그》, 2015년 KBS Cool FM 《정재형 문희준의 즐거운 생활》, 2018년 KBS2 《건반 위의 하이에나》 MC 활동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
안테나 대표
2015년 안테나 뮤직(Antenna Music)에서 안테나(Antenna)로 회사명 변경, 본사 이전, 공식 웹 사이트 개편 변경을 하고 2015년부터 직접적으로 안테나 대표와 총괄 프로듀서로 안테나를 운영하고 있다. 현재 소속된 아티스트는 토이(유희열), 정재형, 루시드 폴, 페퍼톤스(신재평, 이장원), 박새별, 윤석철, 이진아, 적재, 정승환, 권진아, 샘 김, 서동환이다.
↑당시에는 엔지니어 윤정오, 유희열 둘로 이루어진 프로젝트 팀이었으며 유희열은 토이의 초기 음악적 방향을 외국의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 팀과 비슷하게 가려고 했다. 실제로, 외국의 아티스트들같은 경우 프로듀서 중심이 돼서 여러 연주자들과, 여러 보컬리스트들과 같이 작업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에선 015B의 경우가 있었지만 토이는 유희열이 주로 보컬을 하고, 윤정오가 엔지니어링을 유희열이 곡을 써서 멋진 팝 팀을 만들려고 했었다. 유희열이 가이드를 부르다 보니까 주변의 많은 분들의 의견에 따라서 객원 가수제로 바뀌었다. 팀 이름의 뜻은 두 사람 성의 이니셜을 TwoY의 약자로 Two을 발음 나는 대로 TO라고 써서 TOY(두명의 Y가 있다)라고 지었는데 당시엔 뭔가 의미를 숨겨서 담아내는 게 유행이었다.
↑윤하는 평소 욕심이 많은 성격으로 이 곡을 윤하 혼자 6시간 정도 녹음을 했다고 한다. 녹음할 때 유희열에게 계속 녹음 다시 한다고 했다고 했는데 유희열은 "아니 됐어. 좋아 좋아~"라고 말해도 윤하는 "다시 한번만.. 이 부분만 다시 한 번만.." 6시간을 내리 혼자 했다고 한다. 그러더니 유희열에게 전화를 해서 다시 하겠다고 해서 유희열은 '왜 이렇게 욕심이 많나'라고 생각해서 "왜 그렇게 욕심이 많냐"고 윤하한테 물어보니 윤하는 노래를 잘한다는 게.. 그전에는 어떻게 하면 음역대를 더 늘릴 수 있을까 등의 그런 고민만 하다가 그러다가 <오늘 서울은 하루종일 맑음> 노래를 불렀을 때 많은 분들이 "윤하 맞아?" 이렇게 들으실 정도로 그런 감성적인 부분이 자신에게 부족하다는 걸 완전히 정말 멍하게 생각을 하게끔 해준 곡이였던 거 같아서 윤하에게 굉장한 터닝포인트가 됐던 곡이었다고 한다. 유희열은 녹음할 때 "윤하야 거기 네가 지금 넋이 나간 여자야. 네가 미쳤다고 생각을 해. 정신 나갔는데 TV가 켜져 있어. 그러면 넌 어떻게 하겠어?"라는 얘기를 해줬다고 한다 (2008.11.23, 유희열의 라디오 천국)
↑대한민국의 음악인 유희열의 소품집으로서, (연출 - CF감독 조원석, 음악감독 - 유희열) LG전자가 X Note 홍보 목적으로 제작한 크로스오버 필름 캠페인과 손잡고 제작된 작품이다. 크로스오버 필름은 ‘여름, 사랑, 추억’이라는 테마로 현빈, 류승범, 신민아가 주연을 맡고, 유희열의 음악을 담아 발표되었으며, 소품집은 1만장 한정판으로만 제작되었다.
↑유희열 : 시작부터 끝까지 천재임을 확인해주며 평생 갖기 힘든 좋은 앨범을 만들어준 희열...고맙다! (김연우 2집《연인》- Thanks To)
↑ 가나유희열의 스케치북에 박정현이 출연해서〈아무말도, 아무것도...〉곡에 대한 에피소드를 얘기했었는데 박정현 말에 의하면〈아무말도, 아무것도...〉곡 컨셉이 있었다고 한다. 박정현의 끝에서 끝까지(완전 낮은음부터 제일 높은 음까지) 하는 거였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 유희열과 만났을 때 박정현의 음폭이 어떻게 되는지 재봤다고 한다. 유희열이 박정현에게 "제일 낮은음 해 보세요." 하면 박정현이 소리를 내고 유희열은 옆에서 기록하고 있었다고 한다. 박정현은 속으로 유희열이 '설마 거기부터 거기까지(끝에서 끝까지) 안 쓰시겠지..' 생각했지만 정말 그렇게 곡을 만들었다고 한다. 유희열은 자기가 부르는 게 아니니까 그렇게 했다고 한다. 박정현은 노래가 되게 멋있게 나왔고 가사도 되게 멋있었는데 노래가 참 되게 좋았는데 고마워해야 할지 미워해야 할지..라고 말했는데 유희열이 박정현에서 그런 의미에서 타이틀곡에서 밀렸냐고 하니까 박정현이 그때 당시엔 3집 첫번째 수록곡으로 타이틀곡이었다고 한다. 근데 이상하게도 그때 사람들이 박정현이 진지한 곡을 하는 것을 듣고 싶지 않았던 거 같아서 바로 접고 하림과 양정우 작곡, 윤종신 작사의 <You mean Everything to Me>를 밀었는데 대박 났다고 한다. 이후 보컬 전쟁: 신의 목소리에 정인, 박정현 등이 출연했는데 정인이 <뜨거운 안녕>을 부르게 돼서 30분 안에 연습하고 불러야 해서 정인이 어떻게 하냐고 하니까 같이 있던 박정현이 정인에게 말하길 "희열이 오빠 멜로디 참.. 답이 안 나온다며 근데 노래 너무 좋다"고 정인에게 말해주었다.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윤하가 출연해서〈편한가봐>를 부르고 곡에 대한 에피소드를 얘기했었는데 유희열이 <편한가봐>는 자신이 준 곡이라며 언제 들어도 좋다며 자신이 봐도 "어쩜 이렇게 코드 진행이 환상적인지.." 라고 말하며 너스레를 떨자 윤하는 유희열은 코드를 너무 꼬아서 부르기 힘들다고 한다. 유희열이 직접 안 부른다고 너무 고음에 숨 쉴 곳 없이 만드셨다고 하자 유희열은 사람이 얼마나 높이 올라갈 수 있는지 도전하는 정신으로 만든다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유희열 : 바쁜 와중에도 우리를 위해 힘써준 광기어린 천재! 넌 가요계의 법이 될 것이다. (015B 6집 《The Sixth Sense》 - Special Thanks To)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김경호 (가수)가 출연해서〈그때가 아닌 지금〉곡에 대한 에피소드를 얘기했었는데 2000년 당시 김경호와 유희열은 동갑인데 서로 인사를 나눴던 적도 없었는데 김경호가 유희열에게 곡을 받기 위해 직접 유희열의 집을 수소문해서 찾아가서 곡을 달라고 졸랐다고 한다. 유희열 말에 의하면 김경호가 왼손에 황도 통조림을 들고서 찾아왔었던 게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김경호는 유희열 집에 찾아갔던 때에 겨울이라 눈이 많이 와서 과일이 다 얼어있고 시들해서 과일을 대신할 건 이것밖에 없겠다고 생각해서 통조림을 사들고 갔다고 한다. 유희열은 그게 인상적이었는데 안 그래도 자신이 아파보이는데 사가지고 오셔서 너무 기뻤다고 한다. 또 인상적이었던 건 무턱대고 찾아와서 곡을 달라고 하면서 유희열을 되게 어려워했다고 한다. 김경호가 유희열에게 선생님라고 불렀다고 한다. 당시 김경호는 유희열의 나이를 잘 몰랐다고 한다. 김경호가 왜 찾아갔냐면 토이 앨범의 곡들을 들어보다가 다른 곡들도 인상깊었지만 김연우가 부른 <여전히 아름다운지>를 듣고 멜로디가 너무 이쁘고 너무 좋아해서 무대 외적인 곳에서 정말 많이 부르고 다녔다고 한다. '아 이런 곡을 써주셨으면..' 해서 무턱대고 찾아갔다고 한다. 그래서 유희열이 김경호에게〈그때가 아닌 지금〉주었는데 유희열이 마음에 드셨냐고 물어보니까 김경호는 정말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유희열이 근데 그곡으로 활동하는 모습을 한 번도 안 봤다고 하니까 김경호는 열심히 불렀는데 발라드처럼 감미롭게 부를려고 했는데 결국은 다시 락발라드 김경호 스타일대로 노래가 불러졌다고 한다.
↑MBC 강변가요제는 본선 무대에 10팀 올라오게 되는데, 아마추어로 노래를 가지고 가기 때문에 편곡은 전문 작곡가 다섯명이 한명당 두팀씩 맡아 멘토 역할을 해서 편곡을 해주고, 무대에서 해야 할 것 등도 말해준다고 한다. 당시 유희열은 심사위원 중에서 나이가 제일 어려서 막내로 선배 작곡가들이 먼저 고르고 난 남은 나머지 두곡을 유희열이 맡에서 편곡을 했다고 한다. 그중 한명이 대상을 받았던 배연희의 〈소중한 너에게〉, 이수근이 속했던 팀 <동대문 남대문> 이었다고 한다.
↑2000년 임재범임재범이 직접 참여한 임재범 베스트 앨범 《Memories》가 발매되었다. 유명 프로듀서들이 새로 편곡을 하고, 임재범이 새로 불러 녹음한 앨범. 유희열이 편곡한 임재범의 <고해>는 가스펠적인 느낌과 토이의 느낌이 같이 있는 웅장한 곡으로 편곡했다.)
↑윤상의 곡을 동료, 후배 아티스트들이 재해석한 일종의 헌정앨범 성향을 띄는 음반이다. 앨범 컨셉 아이디어를 유희열이 제공했는데, 유희열이 윤상에게 앨범 프로듀서까지 맡아서 하겠다고 해서 유희열이 앨범 프로듀서를 할 예정이었다. 윤상은 유희열이 앨범 기획에 관한 내용을 정리를 해서 자신한테 연락을 줄 거라고 기다렸는데.. 1년이 넘도록 유희열이 별다른 얘길 안 해서 결국 박창학 이 앨범의 기획, 정리를 다 했다고 한다. 윤상이 말하길 "희열씨가 아이디어만 주고 뒷 수습을 안 해줘서 결국 박창학씨가 다 마무리 했다고.." 이 얘긴 윤상이 Song Book 앨범 발매했을 때 자신의 공식 홈페이지에서도 언급. "막연한 아이디어를 현실이란 무게로 정리해준 특별한 친구 박창학 씨에게 무한 감사 드립니다." (유희열의 라디오 천국, 2008년 12월 31일)
↑가수, 작곡가, 프로듀서, 전자음악 프로듀서. 1995년 뉴욕대(New York University)에서 뮤직 테크놀러지를 전공하고, 1997년에는 맨하탄 센터 스튜디오에서 어시스턴트 엔지니어로 일한 뒤 작곡가, 프로듀서로 활동. 브라운 아이드 걸스의 <YOU>,<CANDY MAN>(이민수와 공동작곡, 김택수 편곡), <LOVE>(이민수와 공동작곡, 공동편곡), <MY STYLE>(편곡). 김재중의 <LET THE RHYTHM FLOW>, <DON'T WALK AWAY>(작곡, 편곡), 가인의 <가인(歌人)> (작곡, 편곡), 아이유의 <잔혹동화> <기다려>(작곡, 편곡), 이승환의 <'I Hate It'>,<망각> (유희열과 공동편곡), 유희열의 <흔적> (피아노 연주곡에 테크노를 가미한 크로스오버 테크노 연주곡으로 유희열과 공동작곡, 공동편곡, Co-Producer) 무한도전 자유로 가요제 유재석,유희열 <댄스왕> (유재석,유희열과 공동작사, 유희열과 공동작곡, 공동편곡) 외 다수 앨범 참여
↑원래 다른 노래에 유희열 특유의 변태 멘트 딱 한마디가 필요해서 타이거 JK가 유희열한테 연락했는데 유희열이 다른 곡들을 보내보라고 해서 다른 곡들을 보냈다고 한다. 유희열이 듣고 직접 오겠다고 해서 왔는데 유희열은 변태 멘트는 아니고 피아노를 쳐주겠다며 원래 피아노 연주 부분이 있는 곡〈Hello Happy〉가 있는데 이 곡을 유희열이 약간 다르게 연주하면 좋을 거 같다고 해서 원래 피아노 연주가 돼 있는 부분을 유희열이 피아노 부분만 다르게 연주했고(피아노 부분 편곡) 유희열의 피아노 연주 버전이 앨범에 실리게 됐다.
↑이승환의 데뷔 20주년 기념 앨범 《환타스틱프렌즈》는 가요계 후배들이 재해석한 이승환의 기존의 8곡 과 신곡 2곡으로 구성된 앨범이다. 유희열이 참여한 곡은 〈내가 바라는 나 (Vocal 김종완)〉로, 유희열이 직접 선곡하고 편곡했다. 녹음 믹싱 할 때 이승환과 편곡 감독인 유희열은 계속 잡담하고 보쌈 먹고 놀았는데 김종완이 후반 작업을 혼자 다 해서 어느새 끝냈다고 한다. 녹음실에서 김종완이 나중에 이승환에게 말하길 "희열이 형은 정말 녹음실에서 뭔가를 많이 할 줄 알았어요. 근데 한 게 뭐죠?" 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승환은 물론 편곡을 유희열이 다 했다고 한다. 다 하고 결과물을 쏜 거긴 하지만 그후에 믹싱 할 때 거의 안 했다고 하자 유희열이 말하길 "아니 그걸 뭐하러 합니까? 정말 대가의 손길을 모르시는군요. 연기는 연기자가 하는 겁니다. 그걸 바라보고 있고 끊임없이 기다리고 있고 왜냐면 불안감을 안 주기 위해서"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프랑지파니>는 2007년에 발매된 토이 6집에 수록되었던 곡으로 브라질 뮤지션 세르히오 멘데스 밴드 여성 보컬리스트였던 '던 비숍(Dawn Bishop)'과 유희열이 각각 포루투칼어와, 한국어로 번갈아서 부르다가, 나중엔 서로 주고 받는 특이한 형식으로 새롭게 바꿨다. 외국에서 레코딩 작업을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