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2월 24일(1959년 음력 1월 17일)에,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나, 1978년 CBS 《세븐틴》의 DJ를 맡으며 라디오 DJ로 먼저 데뷔하였다. 1981년 MBC TV 프로그램 《영 일레븐》의 MC로도 진출하였다. 데뷔 초에도 타고난 입담과 함께 1970년대 한국음악의 근간이었던 통기타 포크 팝 발라드 음악 분야에서 1980년대 정통 팝 발라드 음악계로 넘어오자, 1983년 발라드 가수로 정식 음악 활동을 시작하면서 가수 활동에도 첫발을 내디뎠다.
1983년 《나는 행복한 사람》과 1984년에 2집 《파랑새》를 발표하였으나 직후에는 이렇다 할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그의 가수로서 성공은 1985년 당시 은인과도 같은 작곡가 이영훈을 만나게 되면서 꽃피운다. 3집 `난 아직 모르잖아요`라는 곡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그 해 방송 순위 1위에 오르며 인기 가수 대열에 오른다. 이때부터 이문세-이영훈 둘의 콤비 체제는 1980년대의 가요계에 팝 발라드 음악을 널리 알렸다.
1987년에 발표한 4집 수록곡 중 대다수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면서 높은 판매고를 올렸고,[2] 팝 발라드 음악 가수로서 인기를 확고히 했다. 1993년부터 개인사정으로 그 때까지 자신의 음악 동반자였던 이영훈과 결별하고, 그때부터 자신만의 독자적인 음악세계를 만들고자 발판을 다졌으나 그 변신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는 못한다.[2] 1996년에 발표한 《조조할인》을 통해 본격 음악적 이미지 변신을 시도했다. 1998년에는 이문세 자신이 가사를 직접 작사하고, 가수 겸 작곡가조규만이 작곡하면서 받은 노래인 타이틀곡 《솔로 예찬》을 발표했다.
특히 청소년을 주청취자로 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별이 빛나는 밤에》 진행자로 수년간 활약하며, 1990년대 초반에는 '밤의 교육부 장관'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2001년에는 작곡가 이영훈과 8년 만에 재회하여 이영훈이 작사 및 작곡한 《기억이란 사랑보다》라는 노래를 받아 발표하였다.
인간 관계
이문세는 은인이나 다름없는 이영훈이 대장암으로 입원 당시 본인의 이미지 개선을 위해 이영훈에게 사전에 통보도 없이 병실로 기자(‘간장종지 사건’으로 유명한)와 카메라를 대동해 다음 날 시문1면에 기사를 싣고 이영훈에게 잠수를 탄다. 이후 이문세가 배신했던 전 매니저 오씨의 증언에서 이영훈의 장례식에 조의금으로 20만 원을 내려고 했으나, 이영훈과 단순히 아는 사이거나,인연이 짧은 윤도현, 김장훈조차도 100만 원, 200만 원을 조의한 것을 알고 근처 ATM에서 100만 원을 뽑아오라 시켰다고 했다. 다음해 소지섭이 친구 박용하를 위해 장례금을 전부 낸 것과 대조된다.
이수만, 유열과 셋이서 당대 발라드를 주름잡은 이른바 '마삼 트리오'로 유명했는데 셋 다 인상이 말(馬)상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계기로 셋은 친분이 생겼고 그 때로부터 현재까지 주기적으로 모임을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