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은 1904년 5월 21일 FIFA가 창립될 때를 부근으로 창립되었고, 1904년 5월 1일, 브뤼셀에서 열린 벨기에와 첫 공식 국제 경기를 치렀고, 경기는 3-3 무승부로 끝났다.[1] 이듬해인 1905년 2월 12일, 프랑스는 스위스와 모국에서 첫 경기를 치렀다. 경기는 500명 관중이 웅집한 파르크 데 프랭스에서 열렸다. 프랑스는 이 경기에서 가스통 시프레의 결승골에 힘입어 1-0으로 이길 수 있었다. FIFA와 프랑스의 스포츠 연합인 프랑스 체육 스포츠 사회 연합 (Union des Sociétés Françaises de Sports Athlétiques, USFSA) 간의 갈등으로, 프랑스는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애로가 많았다. 1908년 5월 9일, USFSA와 상반된 입장을 지닌 프랑스 국제연합 위원회 (CFI)는 USFSA가 아닌 FIFA가 향후 올림픽 대회에서 클럽의 출전에 관여할 것이라고 손들어주었다. 1919년, CFI는 프랑스 축구 협회로 재조직되었다. 1921년, USFSA가 프랑스 축구 협회에 합병되었다.
1930년 7월, 프랑스는 우루과이에서 열린 초대 FIFA 월드컵에 출전했다. 몬테비데오의 에스타디오 포시토스에서 열린 역사상 최초의 월드컵 경기에서, 프랑스는 멕시코를 4-1로 꺾었다. 뤼시앵 로랑은 프랑스의 월드컵 1호골을 득점한 것으로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월드컵 역사상 1호골을 득점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프랑스는 이후 아르헨티나와 칠레와의 나머지 조별 리그 경기에서 연달아 0-1로 패했고, 결국 1라운드에서 탈락했다. 이듬해, 국가대표팀은 처음으로 흑인을 승선시켰다. 라울 디아뉴는 세네갈계로, 2월 15일에 2-1로 이긴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경기에서 첫 출전의 영예를 안았다. 디아뉴는 이후 북아프리카계 출신으로는 최초로 국가대표팀에 승선한 라르비 벤바레크와 함께 1938년 FIFA 월드컵에 출전했다. 1934년 FIFA 월드컵에서도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에게 2-3으로 패하며 또 1라운드에서 탈락했다. 팀이 파리에 귀환했을 때, 4,000명의 웅집한 팬들은 영웅으로 칭송하며 환영했다. 프랑스는 1938년 FIFA 월드컵을 개최해 8강에 올랐으나, 디펜딩 챔피언 이탈리아에게 패해 탈락했다.
1950년대, 프랑스는 쥐스트 퐁텐, 레몽 코파, 장 뱅상, 로베르 종케, 마량 위스니에스키, 타데 시소우스키, 그리고 아르망 팡베른 등의 선수들을 앞세워 처음으로 황금기를 맞이했다. 1958년 FIFA 월드컵에서 프랑스는 준결승전까지 진출했으나 브라질에 패하였다. 3위 결정전에서, 프랑스는 퐁텐의 4골에 힘입어 서독을 6-3으로 격파했고, 그에 따라 퐁텐은 FIFA 월드컵 역대 한대회 최다 기록인 13골을 기록했다. 이 기록은 현재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프랑스는 1960년에 열린 초대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를 개최하였고, 2대회 연속으로 준결승전에 올랐다. 본선에서, 프랑스는 유고슬라비아한테 75분까지 4-2로 앞서나갔으나 4-5로 충격적인 역전패를 당하였다. 3위 결정전에서, 프랑스는 체코슬로바키아에 0-2로 패했다.
이달고의 지휘 하에, 프랑스는 다시 부흥했는데, 마리위스 트레소르와 막생 보시와 같은 수비수, 도미니크 로슈토와 같은 수비수, 그리고 팀의 중심이자 "마방진" (carré magique) 을 구성한 미셸 플라티니와 장 티가나, 알랭 지레스, 그리고 루이스 페르난데스 등의 우수한 인재로 1982년 FIFA 월드컵을 시작으로 상대의 수비를 무너뜨리고, 서독을 상대한 준결승전까지 올라가 승부차기 끝에 패했다. 준결승전 경기는 FIFA 월드컵 역사상 최고의 경기로 손꼽히는 것과 동시에 논란이 수반된 경기였다.[2] 프랑스는 그로부터 2년 후, 처음으로 국제대회 우승을 거두었는데, UEFA 유로 1984를 개최해 우승하였다. 대회에서 역대 한 대회 최다골인 9골을 기록한 플라티니의 지휘 하에, 프랑스는 결승전에서 스페인을 2-0으로 꺾었다. 이 경기에서 득점한 선수들은 플라티니와 브뤼노 베욘이었다. 유로 대회를 우승한 후, 이달고가 지휘봉을 내려놓았고, 전 국가대표 앙리 미셸이 그의 뒤를 이었다. 프랑스는 이후 올림픽 국가대표팀이 1984년 하계 올림픽축구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며 그랜드 슬램을 달성했고, 이듬해에는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의 전신인 아르테미오 프란키 트로피에서 우루과이를 2-0으로 꺾고 우승했다. 결승골은 도미니크 로슈토와 조세 투레가 넣었다. 1년의 기간 안에 프랑스는 3개의 주요 대회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했다. 1986년 FIFA 월드컵에서, 프랑스는 우승 후보로 점쳐졌고, FIFA 월드컵 2대회 연속으로 준결승전에 올라 또다시 서독을 상대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이번에도 서독에 또 패했다. 벨기에와의 3위 결정전에서 4-2로 이긴 프랑스는 3위로 대회를 마감했다.
1988년, 프랑스 축구 협회는 국가 축구 단지인 클레르퐁텐을 개장했다. 개장식에는 프랑수아 미테랑,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 참석했다. 클레르퐁텐 개장 5개월 후, 앙리 미셸 감독이 경질되었고, 플라티니가 후임이 되었으나, 그는 1990년 FIFA 월드컵 본선행에 실패했다. 플라티니는 비록 UEFA 유로 1992 본선행에 성공하였고, 대회 전에 19경기 무패행진 기록을 세웠으나, 1라운드를 통과하지 못했다. 대회 종료 1주 후, 플라티니는 지휘봉을 내려놓았고, 그의 수석 코치였던 제라르 울리에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울리에 감독의 지휘 하에, 프랑스 국가대표팀과 팬들은 이스라엘전과 불가리아전에서 1994년 FIFA 월드컵 본선행을 목전에 두었으나, 실패로 돌아가 좌절감을 느끼게 했다. 프랑스는 이스라엘전에서 2-3으로 패했고, 불가리아전에서도 1-2로 충격적인 패배를 당했다. 이후 공공적인 비난의 대상이 된 울리에는 해임되었고, 국가대표팀에 활약하던 몇몇 선수들이 은퇴했다. 그의 수석 코치인 에메 자케가 뒤를 맡게 되었다.
에메 자케의 지도 하에 국가대표팀은 가장 성공적인 시대를 겪었다. 베테랑으로 조직된 팀이 1994년 FIFA 월드컵 본선행에 실패하자, 거물급 신예들이 팀에 합류했다. 프랑스는 UEFA 유로 1996에서 준결승전에 진출해 체코에게 승부차기에서 5-6으로 패하며 다소 우려스럽게 출발했다. 자국에서 열린 1998년 FIFA 월드컵에서 자케의 프랑스팀은 조1위로 16강에 진출하여 16강에서 파라과이를, 8강에서 이탈리아를, 준결승에서 크로아티아를 꺾고 사상 첫 월드컵 결승에 올랐다. 결승전이 열린 스타드 드 프랑스에서 프랑스는 브라질을 3-0으로 꺾고 우승하였고, 프랑스 축구 역사의 정점을 찍었다. 자케는 월드컵 우승 후 감독에서 물러나 은퇴하고 수석 코치인 로제 르메르가 이어받아 UEFA 유로 2000 우승으로 이끌었다. FIFA 올해의 선수인 지단의 지휘 하에, 프랑스는 결승전에서 이탈리아를 2-1로 잡았다. 트레제게가 연장전에서 골든골을 득점했다. 이 대회 우승으로 프랑스는 1974년 서독 이래 처음으로 FIFA 월드컵과 UEFA 유로를 모두 우승하는 영예를 안았다. 그 결과, 프랑스의 FIFA 랭킹이 1위로 상승했다.
프랑스는 이어지는 주요 대회에서 이전의 성공을 반복해 내지 못했다. 비록 프랑스는 2001년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정상에 올랐으나, 2002년 FIFA 월드컵에서 충격적인 무득점 1라운드 탈락을 경험한 것이다. 즉, 프랑스는 이 대회에 처녀 출전한 세네갈에게 개막전에서 0-1로 패배하면서 FIFA 월드컵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결과를 낸 데 이어, 우루과이와의 2차전에서 0-0 무승부, 덴마크와의 3차전에서 0-2로 패배하는 졸전을 거듭한 끝에 1950년의 이탈리아와 1966년의 브라질의 뒤를 이어 1라운드에서 탈락한 FIFA 월드컵 세번째 전대회 챔피언으로 목록에 올랐다. 그리고, 그 후로 2010년에 이탈리아가 한번 더, 2014년에는 스페인이 이 목록에 등재되었다.[3]
프랑스가 대회에서 조 최하위로 탈락하자, 르메르가 자리했던 사령탑은 자크 상티니가 차지했다. 다시 힘을 회복한 프랑스는 UEFA 유로 2004를 인상적으로 시작했으나, 결국 8강에서 나중에 우승을 차지할 그리스에게 무기력하게 패해 떨어졌다. 상티니 감독이 사임하자 레이몽 도메네크가 그를 대신하게 되었다. 프랑스는 2006년 FIFA 월드컵 예선 초반에 부진한 행보를 보였다. 그 결과, 도메네크는 전 국가대표 선수들에게 국가대표팀 은퇴를 번복하고 본선행을 도와달라고 설득했고, 이는 예선 최종전에서 키프로스를 상대로 4-0으로 이기면서 달성되었다. 2006년 FIFA 월드컵에서 프랑스는 조2위로 16강에 올라 이후 16강서 스페인, 8강서 브라질, 준결승서 포르투갈을 차례로 제압하고 조별 리그에서부터 무패로 결승전까지 올라갔다. 프랑스는 결승전에서 이탈리아를 상대했고, 연장전에서 논란의 신경전 끝에 지네딘 지단이 퇴장 당했고, 결승골 득점에는 실패했으며, 이탈리아를 상대로 선제골을 넣었우나 이후 이탈리아의 마테라치에 동점골을 먹혀 1-1로 연장전을 마무리해 이후 이탈리아에게 승부차기에서 3-5로 패해 2006년 FIFA 월드컵 우승에 실패했다.
프랑스는 UEFA 유로 2008의 예선전에서 우수한 활약을 펼쳤고, 스코틀랜드전 2패에도 불구하고 무난히 본선행에 올랐다. 프랑스는 죽음의 조 (네덜란드와 이탈리아를 포함한 조)에서 탈락해 1라운드만에 퇴장했다. 전 대회 FIFA 월드컵 예선전처럼, 2010년 FIFA 월드컵 예선전도 프랑스는 실망스럽게 시작해 참사에 가까운 패배와 예기치 못한 승리를 거두었다. 결국 프랑스는 조에서 2위를 차지해 아일랜드와 남아프리카 공화국 본선행을 가지고 UEFA 플레이오프에서 경합했다. 1차전에서, 프랑스는 아일랜드를 1-0으로 이기고, 2차전에서 논란의 상황 끝에 1-1로 비겨 FIFA 월드컵 본선에 안착했다.
2010년 FIFA 월드컵 본선에서도, 프랑스는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며 1라운드에서 탈락했고, 공공적으로 국가대표팀은 부정적인 평을 받아 프랑스 복귀 이후에도 더 많은 파장이 불어왔다. 대회 도중, 멕시코에게 0-2로 패하자 스트라이커니콜라 아넬카가 레이몽 도메네크 국가대표팀 감독과의 언쟁 끝에 국가대표팀에서 쫓겨났다.[4][5] 아넬카와 선수들, 코칭스태프, 협회간의 불화로 인해, 선수들은 조별 리그 최종전을 앞두고 훈련을 단체 거부하는 사태가 나기도 했다.[6][7][8] 훈련 거부 사태의 여파로, 로슬린 바슐로 체육 장관은 선수들에게 "프랑스의 치욕적인 FIFA 월드컵을 A조 조별 리그 최종전 전날의 감정적인 연설과 분루로 바꾸었다"라며 선수들을 꾸짖었다.[9] 프랑스는 개최국 남아프리카 공화국과의 최종전에서 1-2로 패배해 결국 1라운드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프랑스가 1라운드에서 탈락한 날, 니콜라 사르코지프랑스 대통령이 다수 언론을 통해 티에리 앙리 주장의 요청에 따라 그와 만나 국가대표팀과 연관된 사건들에 대해 토론해 볼 것이라 보도되었다.[10] FIFA 월드컵 대회 종료 후, 장-피에르 에스칼레트 협회 회장이 사임했다.
이미 경질이 확정된 도메네크의 후임은 전 국가대표 로랑 블랑으로 확정되었다. 2010년 7월 23일, 블랑 감독의 요청에 따라, 협회는 노르웨이와의 친선경기를 앞두고 FIFA 월드컵에 참가했던 23명의 선수에게 모두 징계가 내려졌다.[11] 8월 6일, 5명의 선수가 2010년 FIFA 월드컵 훈련 불참 사태의 주모자인 것으로 밝혀졌고, 그에 따른 징계가 내려졌다.[12][13]
1972년, 파르크 데 프랭스는 리모델링을 통해 파리의 최대 경기장으로 발돋움했고, 프랑스는 이 구장을 정식 홈구장으로 활용하였다. 프랑스 국가대표팀은 FIFA 월드컵과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예선전 경기들 중 중요도가 떨어지는 경기들을 여전히 이곳에서 치르곤 한다. 프랑스 국가대표팀은 해외 영토에서 홈경기를 두번 열었는데, 한번은 2005년에 마르티니크포르-드-프랑스에서 코스타리카를, 2010년에는 레위니옹생드니에서 중국을 상대하였으며, 이 두 경기 모두 친선전이었다.
1998년 FIFA 월드컵을 앞둔 1998년, 스타드 드 프랑스가 프랑스 국립경기장으로 개장하였다. 파리 교외의 생드니에 위치한 경기장은 81,338명을 수용 가능한 전좌석 구장이다. 프랑스가 이곳에서 치른 첫 경기는 1998년 1월 28일에 열린 스페인전이었다. 프랑스는 이 경기에서 지네딘 지단의 결승골로 1-0으로 이겼다. 이 경기 이후로, 프랑스는 대부분 홈경기를 이곳에서 치렀다.
홈경기나 원정경기 직전, 국가대표팀은 클레르퐁텐-앙-이블린에 위치한 클레르퐁텐 단지에서 훈련에 임한다. 클레르퐁텐은 국립 축구 단지로 국내 12개의 엘리트 단지들 중 하나이다. 이 단지는 1976년, 페르낭 사스트르 전 협회장에 의해 개설되었고, 1988년에 공식적으로 개장되었다. 이 단지는 프랑스 국가대표팀이 1998년 FIFA 월드컵을 우승할 당시 사용했던 거처로써 그 시기를 기점으로 언론의 주목 대상이 되었다.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은 청색, 백색, 그리고 적색을 조합한 삼색의 조합을 사용한다. 국가대표팀의 3색은 프랑스 국기인 삼색기 (drapeau tricolore)에서 유래하였다. 프랑스는 1904년, 벨기에와의 첫 국제경기를 기점으로 사용하면서 유니폼에 특색을 입혔다. 첫 경기를 시점으로, 프랑스는 홈경기에서 대체로, 청색 상의, 백색 하의, 그리고 적색 양말을 사용하였고, 원정에서는 상, 하의, 양말이 모두 백색인 유니폼을 사용하거나, 적색 상의, 청색 하의, 그리고 청색 양말을 사용했는데, 원정 유니폼으로는 전자의 조합이 더 자주 사용되었다. 마르 델 플라타에서 열린 헝가리와의 1978년 FIFA 월드컵 경기를 앞두고 두 팀이 백색 유니폼을 준비해 에스타디오 호세 마리아 미네야에 감에 따라, 프랑스는 킴벨리의 녹백 줄무늬 유니폼을 빌려 사용하였다.[14]
1966년부터, 프랑스는 1971년까지 르꼬끄 스포르티브의 유니폼을 착용했었다. 1972년, 프랑스는 독일 스포츠 용품 회사 아디다스와 유니폼 계약을 맺었다. 이어지는 38년간 프랑스와 아디다스는 돈독한 파트너십을 구축하였는데, 이 기간 동안 프랑스는 UEFA 유로 1984, 1998년 FIFA 월드컵, 그리고 UEFA 유로 2000에서 유명한 아디다스의 삼색 삼선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을 우승을 거두었다. 2006년 FIFA 월드컵에서, 프랑스는 결승전까지 포함해 4차례의 토너먼트전에서 상, 하의, 양말이 모두 백색인 원정 유니폼 (상의에 삼색기 그라데이션이 새겨짐) 을 착용하였다.[15] 2008년 2월 22일, 프랑스 축구 연맹은 아디다스와의 파트너십을 종료하고 2011년 1월 1일부터 미국 스포츠 용품회사 나이키와 계약한다고 발표했다. 계약금액은 역대 최고인 €320M으로 7년간 (2011년 1월 1일부터 2018년 7월 9일까지) 유효하다.
프랑스의 나이키 계약은 국가대표팀의 청색 유니폼을 축구 역사상 최고액의 유니폼 기록을 지니게 되었다.[16][17] 나이키가 제작한 유니폼을 착용하고 임한 프랑스 국가대표팀의 역사상 첫 주요대회는 UEFA 유로 2012이였으며, 홈 유니폼은 상, 하의, 양말이 모두 암청색이고, 금색 등번호가 새겨져 있었다.[18] 2013년 2월, 나이키는 상, 하의, 양말이 모두 연청색인 원정 유니폼을 공개하였다.
프랑스는 언론과 팬들에 의해 흔히 청색 군단 (Les Bleus)으로 지칭되며, 국제대회에 참가하며 청색 유니폼이 조합된 모든 프랑스 스포츠 국가대표팀의 별칭으로 사용된다. 국가대표팀은 삼색기 (Les Tricolores) 나 삼색기 군단 (L'Equipe Tricolore) 으로도 불리는데, 자국 국기 색상인 청색, 백색, 그리고 적색을 사용하는 데에서 유래되었다. 1980년대에 프랑스는 미셸 플라티니가 지휘하는 "마법의 사각형" (carré magique) 에 대한 찬사로 "유럽의 브라질"로도 불리었다. 미셸 이달고 감독의 지휘 하에, 프랑스는 남아메리카의 비교대상이 되는 팀과 같은 영감을 주고, 우아하며, 기술적이며, 기술적으로 진보된 공격적 축구를 보여 주기도 했다.[19]
1990년대에 프랑스 국가대표팀은 자국의 다인종 표본으로 전국에 비추어졌다.[20]1998년 FIFA 월드컵 우승을 거둔 프랑스 국가대표팀은 "프랑스 문화"의 사회적 통합에 관한 전망에 있어 자긍심을 고무시킨 것에 자축하였고, 찬사를 받았다.[21] 당시 선수단에 이름을 올린 22명의 선수들은 아르메니아, 알제리, 과들루프, 뉴 칼레도니아, 아르헨티나, 가나, 세네갈, 이탈리아, 프랑스령 기아나, 포르투갈, 그리고 마르티니크가 있었고, 주축 선수인 지네딘 지단의 경우에는 알제리계 이민자 부모를 둔 마르세유 출신이었다.
다인종 팀을 꾸리는 것은 한때 논란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근래 극우전선에 의하면 프랑스 백인들이 인종적 비율에 비해 대표 수가 적다고 발언하면서 수면 위로 올라왔다. 국민전선의 정치인 장-마리 르 펜은 1998년에 월드컵을 우승한 흑인, 백인, 마그렙의 팀은 충분히 프랑스스럽지 못하다고 선동하기도 했다. 2002년, 가나 출신의 마르셀 드사이의 지휘 하에 프랑스 국가대표팀은 공개적으로 프랑스 유권자들에게 르 펜의 당선을 막고 자크 시라크 대통령을 밀어달라고 한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2006년, 르 펜은 레이몽 도메네크가 흑인을 너무 많이 발탁한 것에 대해 선동질을 계속하였다.[22] 2005년, 유대인 혈통의 보수주의 프랑스 기자 알랭 핑키엘크로는 이스라엘 신문 하러츠 (Haaretz) 에 "프랑스 국가대표팀은 사실 흑인 투성이다"라고 사설을 투고한데 이어 "그로 인해 프랑스는 유럽을 우습게 보았다" 라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그는 나중에 자신의 사설이 누구에 피해를 줄 생각이 없었다고 사죄하는데 이르었다.[23]
대중과 팀간의 사회적-인종적 분열은 2010년 FIFA 월드컵 기간에 들어 절정에 치닫았다. 국가대표팀은 본선에 진출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주장인 티에리 앙리가 손을 사용해 윌리암 갈라스의 골을 유도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도착한 후, 국가대표팀은 처음 두 경기에서 득점하는데 실패하였고, 개최국 남아프리카 공화국과의 대결에서 승리하는 방법 외에는 16강 진출 방법이 남지 않게 되었다. 결국, 선수들은 니콜라 아넬카 사태에 대한 잘못된 대응으로 태업을 벌이게 되었다. 아넬카는 퇴출되면서 언론에 부적절한 발언을 한 것이 언론에 밝혀졌다. 선수들은 그의 말이 틀렸으며, 코칭스태프로부터 고발 용의자, 언론, 그리고 협회를 비난하였다. 훈련 대신에 레이몽 도메네크 감독은 방송을 통해 선수들의 진정서를 낭독하였고, 기자들을 충격에 빠트렸다. 친 사르코지 정치 인사들은 반란을 불복적 행위, 선수들을 불한당으로 묘사하기에 이르었고, 발언은 인종적인 연관이 있는 것이 명백했다.
국가대표팀이 프랑스가 식민지 지배의 과거를 너머 소수를 융합하는데 끼친 영향에 대한 의견이 엇갈렸다. 2001년, 프랑스는 알제리를 상대로 1998년 FIFA 월드컵 우승의 성지인 스타드 드 프랑스에서 친선전을 벌였었다. 이는 1954년과 1962년 사이에 전쟁을 벌였던 나라이자, 과거 식민지로 지배했던 국가와의 첫 만남이었고, 결국 경기는 논란의 도마에 오르기까지 했다. 경기 전의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 (La marseillaise) 가 연주되는 와중에 알제리 팬들이 야유를 퍼부었고, 후반전에 프랑스가 4-1로 앞서나가는 골이 터지자, 관중이 난입하였고, 경기가 중단되었다. 경기는 다시 재개되지 않았다.
2011년 4월, 프랑스의 수사 웹사이트인 메디아파르 (Mediapart)는 프랑스 축구 협회가 비밀리에 쿼터제를 도입해 국가 단지 입소하는 이중국적 선수들의 수 제한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폭로하였다. FFF의 성인 대표 수치에 따르면, 협회는 12-13세 연령대의 이중국적 선수들을 30%까지 제한하기를 원한다고 말하였다.[24] FFF는 웹사이트에 "위원회의 누구도 승인하거나 단지 입소 쿼터제를 승인한다는 의견을 내지 않았다"라고 메디아파르의 발표 내용을 부인하는 공식 선언문을 발표해 대응하였다.[25] 협회는 이 사태에 대한 정밀조사를 추진하였고, 그 결과, 프랑수아 블라콰르 국가 기술 디렉터가 수사 결과에 따라 직위가 정지될 수도 있게 되었다.[26]릴리앙 튀람 전 국가대표팀 선수는 주장에 대해 "저는 이것이 농담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망연자실해서 무슨 말을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표의하였고, 파트리크 비에이라는 주장은 로랑 블랑이 낸 것이며 회의는 "심각하고 수치스럽다"고 주장하였다. 프랑스 정부 또한 이 문제에 큰 관심을 가졌는데,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진심으로 어느 형태의 쿼터제든 반대한다." 라고 발언하였고, "쿼터제 실행은 공화국의 종말이 될 것이다." 라고 덧붙였다. 수사 후, 블랑은 무죄로 밝혀졌다.
중계권
국가대표팀은 현재 프랑스의 민영 텔레비전 채널TF1을 운영하는 그루프 TF1과 계약되어 있다. 기존 계약은 2010년 FIFA 월드컵에 만료될 예정이었다. 2009년 12월 18일, 프랑스 축구 협회의 위원회에서 TF1과의 독점 계약 기간을 연장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새 계약의 조항에 따라, TF1은 2010년 8월부터 2014년 6월까지 4년간의 친선경기와 국제대회를 포함한 국가대표팀 경기 중계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TF1은 인터넷 상과 주간 프로그램인 텔레푸트에서 국가대표팀의 시각적 방송 권한도 얻어냈다.[27] 협회는 연간 €45M의 수입을 확보하게 되었는데, 이는 전의 2006년 계약에서 확보했던 €55M보다 €10M이 적은 금액이었다.[28]
프랑스는 1930년에 열린 초대 FIFA 월드컵에 참가한 4개의 유럽팀들 중 한팀으로, 14차례의 FIFA 월드컵 본선에 출전하였고, 역대 5위를 기록하고 있다. 프랑스 국가대표팀은 FIFA 월드컵 우승을 경험해 본 8개의 국가대표팀들 중 한팀이다. 프랑스는 1998년, 2018년에 두 차례 FIFA 월드컵 우승을 거두었다. 대회는 홈 안방에서 개최되었고, 프랑스는 브라질과의 결승전에서 3-0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2006년에 프랑스는 이탈리아와의 승부차기에서 3-5로 패하며 준우승을 거두었다. 2022년 월드컵에서도 우승국 징크스를 깨고 결승전에까지 올랐지만 아르헨티나에 승부차기끝에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프랑스 국가대표팀은 1958년, 1986년에도 두 차례 3위를 차지하였고, 1982년에는 4위를 차지하였다. 본선 참가팀 수가 32팀으로 늘어난 이래 국가대표팀의 역대 최악의 성적은 2002년과 2010년에 1라운드에서 탈락한 것이었다. 2002년에 프랑스는 세네갈과의 경기에서 충격패를 당해 무득점으로 탈락하였고, 2010년에는 멕시코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연달아 패하고 우루과이로부터 승점 1점을 버는 데 그쳤다.[32][33]
프랑스는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가장 성공적인 팀들 중 하나로, 1984년과 2000년에 두 차례 우승을 거두었다. 프랑스는 각 세 차례씩 우승을 거둔 스페인과 독일 다음으로 많은 우승을 거두었다. 프랑스는 1960년에 초대 대회를 개최하였고, 그 후로 7차례의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해 역대 4위로 동률을 기록하고 있다. 프랑스는 홈 안방에서 열린 1984년 대회에서 첫 우승을 거두었고, 당시 발롱도르 수상자인 미셸 플라티니가 지휘했다. 2000년, FIFA 올해의 선수 지네딘 지단을 중심으로 한 프랑스는 벨기에와 네덜란드에서 열린 대회에서 두번째 우승을 거두었다. 프랑스의 대회 역대 최악의 성적은 1964년~1980년 5회 연속 예선 탈락이다.
프랑스는 10번의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대회 중 2번을 출전하였고, 출전한 2대회 모두 우승을 거두었다. 프랑스는 2번의 우승으로 4차례 우승을 거둔 브라질의 뒤를 이어 역대 2위를 기록하고 있다. 프랑스는 1998년 FIFA 월드컵 우승팀 자격으로 참가한 2001년에 대회 첫 우승을 거두었다. 프랑스는 일본과의 결승전에서 1-0으로 승리하였다. 그 다음 컨페더레이션스컵인 2003년 대회에서 프랑스는 UEFA 유로 2000 우승팀 자격과 개최국으로써 대회에 진출하였고, 카메룬과의 결승전에서 연장전 끝에 1-0으로 이겨 우승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