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함대 (일본)
제4함대(
역사러일 전쟁1905년 6월 14일 사할린 작전을 위해 편성되었다. 노후함과 파손된 상태에서 노획한 발틱 함대의 함정을 더해 육군 지원을 위해 사할린으로 향했다. 전쟁은 그후 마무리되었고, 개선 관함식에서의 피로연을 마치고 12월 20일에 해산했다. 중일 전쟁1937년 10월 20일, 상하이에 거주하는 제3함대를 증원할 수 있도록 편제되어 칭다오에 주둔했다. 이 두 개의 함대를 통솔할 수 있도록, 연합 함대에 필적하는 대함대로 지나방면함대가 편성되었다. 청도에 주둔하는 서양 함정을 견제함과 동시에, 황해, 동중국해의 초계 임무를 담당하고 나중에 지나방면함대에 참가하는 제5함대와 같이 실전에 참가하지 않았다. 1939년 11월 15일에 지나방면함대에 속하는 제3, 4, 5함대는 "~ 파견지함대"로 개명했다. 이 때, 제4함대, 제5함대와 순서를 바꿔 ‘제3파견지함대’로 개명했다. 편제된 지 1년 후에는 이미 제5함대 일부 부대를 위임하고 태평양 전쟁에 대비한 출사 준비를 위해 다수의 부대를 제공했다. 1942년 4월 10일 청도 방면 특별근처지대에서부터 종전까지 청도를 거점으로 육전을 전개했다. 태평양 전쟁1939년 11월 15일 이전 제4함대가 ‘제3파견지함대’로 개명하는 동시에 남양 군도의 기지 건설, 지역 조사와 방위에 충당하기에 3대 제4함대를 편성했다. 1940년 11월 15일부터 연합 함대에 편입되었다. 보유 전력은 항만 방어 함정과 정찰 항공대 정도로 ‘이쓰쿠시마’(厳島), ‘야에야마’(八重山), ‘노토로’(能登呂)를 주요 함정으로 했으며, 캐롤라인 제도, 팔라우 제도, 마셜 제도의 방어를 위해 육전용 방비대를 두었다. 군대 구분에서의 취급은, 내남양 방어를 담당하는 내남양 부대로 정해져 있었다. 태평양 전쟁 시작된 후 군대 구분에서 내 남양 외부까지 담당하는 남양 부대와 된 구식 함정을 주력했다. 수상함 기지로 추크 제도, 잠수함 기지로 콰잘레인 환초를 활용했고, 남부 필리핀, 괌 섬, 웨이크섬, 길버트 제도, 동 뉴기니, 비스마르크 제도, 솔로몬 제도의 공략 거점 부대로 기능했다. 웨이크섬 전투나 산호해 해전에서의 실수가 거론된 이노우에 시게요시 사령장관이 경질된 이후에는 자주 사령부가 교체되었다. 외남양 공방이 본격화되기 전에 외남양 방어가 제8함대에 위임되었고, 제4함대는 다시 내남양 부대로 돌아간다. 1943년 말부터 내남양에서도 미군의 반격이 시작되었고, 1943년 11월에 길버트 제도와 타라와가 함락되었으며, 이듬해 1월에는 마샬 군도의 콰잘레인 환초도 함락되었다. 1944년 2월 17일에는 트럭섬 공습으로 인해 중심 거점이 기능이 되지 않자 고바야시 마사시 사령장관이 경질되었다. 연합 함대의 기함은 팔라우에서 퇴각했지만, 여기도 3월말 팔라우 대공습으로 기능이 마비되어 일본군은 내남양의 제해권을 완전히 잃었다. 제4함대의 함대 근거지 수비대로서 의의도 없어졌다. 1944년 3월 4일 일본 해군은 중부태평양방면함대를 신편하여 사이판에 사령부를 뒀다. 이때 제4함대는 그 예하에 들어갔다. 중부 태평양 방면 함대 예하 부대 중 제14항공 함대는 가동되지 못했으며, 실질적으로 제4함대가 전력의 전부였다. 사이판 전투에서 중부태평양방면함대의 사령부는 전멸했고, 원격지에 남겨진 제4함대는 본토의 보급이 완전히 끊겨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각 부대가 자력으로 견딜 수밖에 없었다. 추크 제도 등을 항공 정찰 거점으로서 겨우 사용할 정도였다. 전투 서열사할린 전투
해군대연습
중일 전쟁1938년 2월 1일, 새로 창설된 제5함대로 제19, 14전대로 전속하였다. 제14전대는 제10전대로 서수가 바뀌었다. 1939년 11월 15일1940년 5월 31일1940년 11월 15일
태평양 전쟁
기록소속참전지휘부사령장관
참모장
참고인용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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