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재정부(企劃財政部)는 중장기 국가발전전략수립, 경제·재정정책의 수립·총괄·조정, 예산·기금의 편성·집행·성과관리, 화폐·외환·국고·정부회계·내국세제·관세·국제금융, 공공기관 관리, 경제협력·국유재산·민간투자 및 국가채무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대한민국의 중앙행정기관이다. 장관은 부총리급 국무위원으로, 차관은 정무직공무원으로 보한다.
소관 사무
중장기 국가발전전략수립
경제·재정정책의 수립·총괄·조정
예산·기금의 편성·집행·성과관리에 관한 사무
화폐·외환·국고·정부회계·내국세제·관세·국제금융에 관한 사무
공공기관 관리에 관한 사무
경제협력·국유재산·민간투자에 관한 사무
국가채무에 관한 사무
역사
1948년 미군청 재무부로 권한을 이양받아 정부 수립과 함께 재무부가 발족했다. 당시의 재무부는 정부의 회계·출납과 국채·조세·화폐·금융·전매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또한 국무회의에 제출하는 재정·경제·금융·산업·자재와 물가에 관한 종합적 계획의 수립과 예산편성에 관한 사무를 담당케 하고자 별도로 총리 소속으로 기획처를 두었다. 1955년에는 사무를 조정하여 예산에 관한 사무를 재무부로 이관하고 기획처는 전후 경제부흥을 담당하는 부흥부로 재편되었다. 이때 전매에 관한 사무를 전담하는 전매청이 재무부로부터 분리되었다. 한편, 경제부흥에 관한 사무는 1961년 경제기획원으로 이관되었으며 그 후에도 경제사회발전을 위한 장단기 정책의 수립(재정경제원), 경제정책의 수립(기획재정부) 등으로 변하면서 기재부의 소관 사항으로 남았다.
1961년 7월 5.16 군사 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정부의 주도로 경제기획원이 설립되었다. 송요찬 내각수반은 경제정책을 수립하여 집행을 감독하고 경제부처를 종합·조정하는 기관이 없었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경제의 종합적인 기획과 이의 합리적인 집행조정 및 그 성과를 평가처리하기 위한 상설기구"를 설치한다고 발표했다. 또한 이를 통해 "경제성장이 실질적으로 성장발전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4] 경제기획원은 재무부 예산국과 내무부 통계국의 업무를 이관받았으며 건설부를 폐지하여 하부조직을 일부 흡수하고 산하에 국토건설청과 중앙경제위원회를 두었다. 이를 통해 정부 주도의 효율적인 개발행정을 추진하고자 했다.
경제기획원은 국민경제의 종합적 개발계획의 수립과 발전에 관한 사무를 포함하여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막강한 부처로 자리잡게 되었다. 또한 경제기획원장관이 부총리를 겸직하면서 그 권한이 보다 막강해지게 되었다.
1981년에는 기존의 경제개발계획에서 경제사회발전으로 사무의 범위가 확대되었으며 물가안정과 공정거래 관리도 관할하게 되었다. 또한 기획조정실로부터 내각 각 부처의 기획조정 및 심사분석에 관한 업무를 이관받았다. 다만 대외경제협력에 관한 기능은 재무부로 이관되었다. 공정거래위원회 1990년 주요공정거래업무 이관되었으며,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뒤인 1994년에는 경제기획원과 재무부를 재정경제원으로 통합하였다. 이는 재정정책과 예산기능의 연계성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예산·세제·금융 등의 경제정책을 한 손에 주무르는 거대 부처의 탄생이라는 우려와 외환·금융 분야에서 마찰을 빚어온 두 부처가 한솥밥을 먹으면서 화학적 결합을 어떻게 이룰지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었다.[5]홍재형 경제기획원 장관은 "그 동안 분산돼있던 재정·금융·외환 등의 정책수단을 한울타리에 묶음으로써 정책을 효과적으로 수립하고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경제기획원과 재무부 간의 상호 견제 기능이 없어지게 되었고 금융정책도 견제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6]
1994년의 정부조직 개편에서 가장 쟁점이 된 부분은 예산실 소관 문제였다. 야당이었던 민주당은 기존의 내무부·안기부 축소 등의 개편 요구를 철회하면서 "예산실의 총리실 이관과 한은 독립은 최소한의 요구"라며 예산실 문제에 집중했다. 부처 예산을 총괄하는 예산실이 특정 부처에 치우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는데 이에 대해 민주자유당은 '예산 편성과 경제정책 수립 및 집행부서가 한 곳에 집결해야 정책의 일관성을 기할 수 있다'며 민주당의 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7] 그 외에 규제조직을 감축하기 위해 재무부 정책조정국을 폐지하고 금융 관련 업무를 보던 재무정책국·금융국·증권보험국도 금융정책국으로 통합하면서 한국은행의 영향력이 커지게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8]
1998년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재정경제원을 재정경제부로 개편했다. 예산편성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해 대통령 소속으로 기획예산위원회를 신설하고, 재정경제부 소속으로는 예산청을 두도록 했다. 하지만 장관급 기획예산위원회와 차관급 예산청을 두면서 예산 조직이 비대화되고 예산기획과 집행이 분리되면서 일관적인 예산정책을 기대하기 어려워졌다는 비판도 받았다. 이는 결국 여야 간의 정치적 줄다리기가 초래한 기형적인 조직개편이라는 것이었다.[9]
예산실을 제외하고는 거의 바뀌지 않았단 점도 비판을 받았다. 관치금융 근절과 외환위기 문책 차원에서 금융 조직을 축소하려던 계획은 취소되었으며 나머지 기구도 큰 변동은 없었다. 예산실 역시 기존의 4심의관 14과에서 5국 16과(예산청)으로 오히려 확대되는 모습을 보였다.[10]
하지만 예산기능이 기획예산위원회와 예산청으로 나누어지고 사무 구분도 불명확하여 여러 혼선이 발생하자 두 기구를 합치는 논의가 곧이어 시작됐고 1999년 3월에는 기획예산처로 통합할 것이 결정되었다. 재정경제부는 예산기능의 뒷받침 없는 정책조정기능은 실효성이 없다는 논리로 재경부 외청으로의 잔류를 주장했지만 예산기능의 수직계열화를 주장한 기획예산위의 논리에 따라 총리 직속 기구가 되었다.[11] 신설된 기획예산처는 예산과 연계해 공공부문 개혁을 추진하고 예산·재정운영 및 재정기획·조정 기능을 담당하는 역할이 주어졌다.[12]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재정경제부와 기획예산처가 다시 통합되었다. 이는 정책기획과 조정 역량을 강화하고 재정 기능을 일원화하기 위한 것으로 국무조정실의 경제정책조정 기능까지 모두 하나의 부처에 두는 셈이 된다.[13] 이러한 통합은 재경부 장관이 경제부총리를 겸직하면서도 예산 기능이 없다보니 부처 간 업무 조정이나 경제정책·기획 등에서 한계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번의 통합이 과거 설립된 재정경제원처럼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힘의 쏠림 현상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