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운효자동(淸雲孝子洞)은 서울특별시종로구의 행정동이다. 청운동과 효자동의 이름을 따서 2008년11월 1일 청운효자동으로 되었으며, 법정동은 세종로, 청운동, 효자동, 신교동, 궁정동, 옥인동, 통인동, 창성동, 누상동, 누하동이 있다.
역사
지명 유래
청운효자동의 ‘청운’이란 이름은 청운초등학교 뒤쪽의 청풍계(淸風溪)라는 계곡이 있는 마을의 ‘청’자와 백운동(白雲洞)이라는 마을의 ‘운’자를 따서 지었다. 청풍계와 백운동은 인왕산의 맑은 바람, 맑은 물과 함께 흰 구름으로 덮여 있는 자연환경에서 유래하였다. 조선 초에는 한성부 북부 ‘순화방’ 지역이었다. 1914년 경성부 북부 백운동·청풍동·박정동(朴井洞)·신교(新橋)의 각 일부를 합쳐 ‘청운동’(淸雲洞)이라고 하였고, 1936년 일제가 청운정으로 바꾸었다. 1943년 종로구에 편입되었고, 1946년 종래의 행정구역을 우리말로 개칭하여 다시 청운동이 되었다. ‘효자’란 이름은 선조 때 학자 조원(趙瑗)의 아들 희신과 희철 형제라는 효자가 났다고 하여 쌍효잣골 또는 한자명으로 효곡(孝谷)이라 하였는데, 그 이름을 따서 효자동이라 하였다.[1]
정선 생가 터: 조선 후기의 화가 정선의 집터로, 인왕제색도의 풍경이 여기서 그려졌다. 52세까지 거주하였다.[11] 청운동 89-11번지에 위치하였으며, 경복고등학교 안에 표지석이 있다.
백운장(白雲莊) 터: 조선 말기의 문신 김가진의 집터에 1915년 일본인 키타무라 세이타로(北村淸太郞)가 지은 요정으로, 개업 당시 명칭은 청향원(淸香園)이었으나 1929년에 이름을 바꾸었다.[12] 1962년 9월,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에서 이 일대를 구입하여 지금은 포교원이 들어섰다.[13]
운강대(雲江臺) 터: 조선 중기의 문신 조원(趙瑗)의 집터이다. 청운동 89-11번지에 위치하였으며, 경복고등학교 안에 각자가 남아있다.
청송당(聽松堂) 터: 조선 초기의 문신 성수침의 집터이다. 청운동 89번지에 위치하였으며, 경기상업고등학교 안에 각자가 남아있다.[14]
백세청풍(百世淸風)·대명일월(大明日月) 각자: 송시열이 썼다고 전해지며, 청운동 52-58번지에 위치한다. ‘대명일월’ 각자는 현재 소실되었다.
육청헌(六靑軒) 터: 조선 후기의 문신 김수항의 집으로, 1683년에 지었다.[25][26] 옥인동 47-73번지 일대에 위치하였다.[27]
청휘각(淸暉閣) 터: 육청헌 마당에 있던 누각으로, 1686년에 지었다.[28] 청휘각을 짓고 30년 가량이 지나자 기울어져 조선 후기의 문신 김창업이 새로 지었고, 이후 김수근·김병국·김병교·김학진이 차례로 물려받았다가 민규호에게 넘어갔다.[29]
가재우물(稼齋-) 터: 청휘각 뒤에 있던 우물로, 조선 후기의 문신 가재 김창업이 그 물을 마셨다 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29] 옥인동 47-376번지에 소재하나, 콘크리트에 뒤덮인 상태이다.[30]
송석원(松石園) 터: 조선 후기의 시인천수경이 옥인동 47번지 일대에 지은 집으로,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가 결성되어 일대의 여러 여항시인들이 참여하였다.[31]
벽수산장(碧樹山莊) 터: 윤덕영이 1910년 12월에 송석원 터를 사들여 1937년 준공한 대저택이었다. 일제 강점기 중반까지만 해도 ‘송석원’이라 불렸으나, 나중에 벽수산장으로 이름이 변하였다. 1966년 4월 5일 전소되었고, 1973년 6월 철거되었다. 지금도 옥인동 47-27, 47-33번지에 대문 기둥 가운데 3개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