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
유시민(柳時敏, 1959년 7월 28일~)은 대한민국의 작가, 언론인이다. 서울대학교 재학 시절 학생운동가로 활동했으며 이후 정계에 입문해 제16·17대 국회의원과 제44대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다. 장관직 퇴임 이후에도 정치 활동을 하였으나 2013년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다. 본관은 풍산이며 경상북도 경주 출생이다. 생애1959년 7월 28일에 경상북도 경주에서 아버지 유태우와 어머니 서동필 사이에서 2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1] 13대조는 임진왜란을 극복하는데 힘쓴 중흥의 명재상 의정부 영의정 서애 류성룡이다. 조부 대에 이르러 안동에서 처가가 있는 경주로 이거하였다고 한다. 아버지 유태우는 경주여자고등학교의 역사 교사였다. 큰아버지 유석우는 공무원으로 내남면 면장을 지내기도 했다.[2] 유태우가 만주 소학교의 교직원으로 근무한 일은 후에 의혹으로 제기되었는데, 이를 두고 유시민은 "백부가 면장을 한 것은 맞지만 선친은 일제 치하 때 교사를 하지 않았다. 처음 듣는 얘기라 집안 어르신들께 확인해본 결과 선친은 해방 직후 미 군정이 교사 요원을 공채했을 때 동양사 분야에 응시해 합격했고 6개월 연수 후 경주여자중학교에 부임했다."고 말하며 관련 사실에 대해 해명했다. 1980년 유시민은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이 되었다. 1980년 봄이 되면서 민주화 운동은 더욱 거세어졌고, 이는 5월 15일의 서울역 시위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이 날 서울역 광장에 모인 수만 명의 학생들은 계엄해제와 신군부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는데, 18개 대학총학생회장단은 시위를 계속 할 것인가 아니면 일단 철수할 것인가를 놓고 격론을 벌였고, 서울대학교 학생처장 이수성의 설득으로 대학총학생회장단은 철수를 결정했으며, 심재철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은 대학총학생회장단 대표자격으로 교육부 장관과 담판을 통해 학생들의 안전귀가를 약속받았고, 서울역 철수를 학생들에게 알렸다.[3][4] 이 사건을 '위화도 회군'에 빗대어 소위 '서울역 회군'이라고 불렀다. 이후, 신군부는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내렸다. 이 때 18개 대학총학생회장 중 신계륜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 등은 철수를 반대했고 유시민도 '서울역 회군' 반대파에 섰다. 1980년대 그는 서울대 총학생회 복학생협의회 간부로 활동했으며, 민간인을 프락치로 몰아 감금 고문(물고문, 각목고문, 폭행 등)했던 1985년 '서울대 민간인 감금 폭행 사건'의 주모자로[5]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을 위반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았는데, 이에 대해 항소심 재판부인 서울형사지방법원 항소 제5부에 항소이유서를 제출했고, 이 항소이유서를 계기로 세상에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에 대해서는 팩트체크가 필요하다.). 이 항소이유서는 그의 저서인 《아침으로 가는 길》에 실렸다. 6.29 선언으로 전두환 정권이 노태우 정권으로 넘어가던 당시 유시민은 수배 중의 몸으로 뽀글이 파마로 위장하고 방송사를 출입했다. 유시민은 '유지수'라는 가명으로 1988년 3월 7일부터 4월 11일까지 방송된 MBC 월화 미니시리즈 8부작《그것은 우리도 모른다》란 멜로 드라마의 각본을 썼다. 유시민은 집필료에 대해 "회당 100만원 정도 받았으며 불법 유인물 만드는데 다 썼다."라고 밝혔다. 또한 1989년 3월 26일에 방송된 《MBC 베스트셀러극장》〈신용비어천가〉란 단막극의 각본도 썼다. 현길언 원작소설을 각색한 것으로 이 때는 가명이 아닌 본인 이름으로 방송됐다. 해당 작품은 5공 신군부의 언론통제, 기자에 대한 협박, 회유 등을 다룬 것으로 영화배우 문성근의 텔레비전 드라마 데뷔작이기도 하다.[6] 1997년 언론인으로서 활동하면서 '97대선 게임의 법칙'등을 저술하며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당시 책에서 그는 "김대중은 직접 출마하기보다는 제3의 후보인 조순 서울시장을 대리전으로 내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7] 1999년 12월 6일자 <유시민의 세상읽기-김대중 대통령님께> 라는 《동아일보》 칼럼에서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지지는 바닥을 치고 있으며 집권당 국민회의는 '수평적 정권교체'의 기쁨을 맛본 지 불과 2년 만에 간판을 내리게 됐다"며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리는 '인의 장막'을 경계하는 지식인들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1999년부터 2001년까지 성공회대학교 교양학부 겸임교수로서 활동했다. 제18대 총선때 대구 수성구에서 낙선한 이후 2008년부터 2009년까지 경북대학교에서 인문사회자율전공 개설 교양 과목이었던 '생활과 경제' 과목 강의를 맡았다. 정치 활동2002년 제16대 대선 당시 신당의 창당을 결심하게 되었다. 절필 선언(8월)을 하고 정치에 뛰어들어 2002년 10월, 개혁국민정당(약칭, 개혁당)의 창당을 주도했다. 당시 세 가지 시나리오가 있었다. 노무현 후보가 민주당 다수파와 함께 개혁신당에 합류하는 방법, 민주당과 개혁신당이 별개로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는 방법, 노무현 후보 혼자 개혁신당에 합류하는 방법을 구상했다.[8] 뜻이 맞는 40여명이 각자 500만원씩 내놓았고 2억원으로 신당을 만들었다.[9] 2003년 4월 24일 보궐선거[10]에서 당선되어 16대 국회에 진입했다. 같은 해 4월 29일 의원선서시 캐주얼 콤비에 라운드 티를 입고 등원하며 논란을 일으켰다가 이튿날 싱글 정장에 넥타이를 매고 선서했다. 또한 평소의 자유주의적 소신을 바탕으로, 국기에 대한 경례는 국가주의적 이데올로기의 강제적 주입이기에 이를 굳이 강제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회의적 입장을 표명한 적도 있다. 2003년 11월 열린우리당이 출범할 때 개혁당은 상당수 개혁당원들의 반대도 있었지만 진성당원 투표를 통해 결국 열린우리당에 통합되었다.[11] 2003년 당시의 이슈는 단연 '이라크 파병 동의안' 문제였다. 유시민은 파병 동의안에 반대표를 행사했다. 2004년 연장 동의안에 대해서도 반대표를 행사했다. 2005년 2차 연장 동의안 표결이 다가왔을 때 그는 자신의 반대표 행사는 비겁했다고 후회했다. 그는 "(대통령이) 욕먹을 때는 같이 먹고 비가 올 때는 같이 맞아야 되지 않겠나"라며 2차 연장 동의안 찬성표를 행사했다.[12][13] 유시민은 2004년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의 압승이 확실해 지자 진보정당의 원내 진출을 원하는 유권자의 표가 이탈하여 진보정당으로 옮겨가고 있다며 민주노동당 의원을 찍는 행위는 지역구 2곳을 제외하면 사표(死票)가 될 것이므로 정당표는 민노당에 주더라도 후보표는 열린우리당에 주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는데 이는 민주노동당과의 갈등을 일으켰다.[14] 유시민은 당시 독설로 유명했다. "나는 한나라당 박멸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났다"고 말했고 17대 국회를 "폭력 국회", "박근혜 국회"라고 논평했다.[15] 유시민은 늘 노무현의 정책을 지지했고 "일단 사령관이 '돌격 앞으로'하면 이 산이 아니더라도 가 봐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자신을 변호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을 제안했을 때에는 옹호하기도 했으나 결국, 좌절을 맛보았다.[16] 한나라당에 대해 비판적이었음에도 노무현 대통령이 '대연정'(大聯政)을 제안했을 때 그는 선거구제 개편을 위해서는 대연정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을 했다. 그는 지역주의 극복을 위해서는 의석을 정당 총득표율에 따라 할당하는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2005년 8월 3일 '우리나라 정당정치 이대로 좋은가'라는 토론회에 참석한 노회찬은 대연정 동기의 순수성은 이해하지만 선거구제 개편은 국민이 직접 결정하는 것이 옳다며 국민투표 방식을 제안했다.[17] 유시민은 열린우리당 중도우파 및 합리적 민주당파 및 일부 한나라당, 그 오른쪽에 한나라당 다수파 및 보수적 민주당, 맨 오른쪽엔 '5공당'의 순서로 정당이 개편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정치적인 분열을 만들기 위해서는 충격이 필요하며 연정을 통한 독일식 선거구제로의 이행이 그 충격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18] 2007년 2월 20일에 열린우리당의 분당 사태를 비판하면서 "한나라당의 집권 가능성이 99%"가 되었다고 발언했다. 그는 열린우리당은 총선에서 압승한 이후부터 분당이 예견되었다고 말했는데 열린우리당은 공화제적인 공천 구조를 추구했으나 이것이 정립되지 않았고 기존의 보스에 의한 공천이 사라진 상태에서 공화제적인 공천을 원하는 세력과 자기들이 공천권을 갖기를 원하는 세력간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아 그것이 이어져 분당사태로 연결되었다고 주장했다.[19]이에 대해 범여권은 평화민주개혁세력이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탄생시킨 과정을 보면 그런 이야기를 가볍게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비판했다.[20] 2007년 3월 13일 제이유그룹 사기사건 조사과정에서 서울 동부지검의 검사가 이재순 전 청와대 사정비서관의 연루 사실을 밝히기 위해 피의자에게 허위 진술을 강요했다는 의혹에 대한 내부 감찰결과 및 후속 대책을 김성호 법무부 장관이 보고하는 과정에서 김 장관이 "앞으로 인권존중 수사 시스템을 도입하고 영상 녹화제를 확대하겠다."고 대책을 내놓자 유시민은 "이재순 전 사정 비서관이 무혐의로 결론 났는데, 실추된 그의 명예는 어떻게 회복되느냐. 요즘 시중에는 검찰 내부에 청와대 조지면 영웅 된다던 말이 있는데, 이게 사실이냐."고 김 장관을 몰아 붙였다.[21] 2007년 5월 22일 보건복지부 장관직을 사임한 이후, 일단 열린우리당 소속 국회의원으로서 할 일을 하되 향후 저술 활동도 하고 싶다는 의지를 피력했다.[22] 7월 11일에 대선후보 경선을 앞두고 '대한민국 개조론'을 출간했고 8월 20일 열린우리당 임시전당대회 직후 제17대 대선에 출마(선언, 예비후보 등록은 21일)[23]했으나, 지지율이 낮아 단일화 움직임에 따라 당내 경선에서 사퇴하고 이해찬 후보를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2006년 2월부터 2007년 5월까지 보건복지부 장관직을 역임했다. 보건복지부 장관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당시 야당 의원들이 유시민에 대한 대한 국민연금 보험료 미납 의혹을 제기했다. 1999년 7월부터 2000년 8월까지 13개월 동안 보험료를 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시민은 또한 소득을 축소 신고함으로써 건강보험료 수백만원을 덜 냈다는 의혹도 받았다. 이에 대해 유시민은 "국민연금 보험료를 일시적으로 미납하게 되었음을 대단히 송구스럽게 생각하며 국민 여러분의 이해를 구합니다."라고 해명했다.[24] 2007년 8월 18일 많은 열린우리당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열린우리당은 대통합민주신당에 통합되었다. 유시민은 합당에 찬성하면서 "우리당의 꿈을 접어 가슴 속에 담고 가지만 그 꿈을 포기하지 않겠다"며 "의석수가 143개나 될 거대한 민주신당은 아직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커다란 종이와 같다. 우리가 뜻을 모아 우리당 꿈을 함께 그리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25] 2007년 11월 25일 유시민은 문국현, 정동영 단일화 문제와 관련해 "문 후보가 '정동영 후보의 사퇴에 관해 토론하자'고 했는데 정 후보는 공당의 경선을 통해 선출된 후보"라며 "후보 사퇴 주장은 경쟁자 사이에 예의도 아니고 공당 후보에게 할 말도 아니다. 정말 공당 경쟁에서 있을 수 없는 오만한 반응"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문 후보는 여당 후보인지 야당 후보인지 대선에서 자기의 위치를 명확하게 해야 한다"며 "문 후보는 깨끗하고 훌륭한 기업인이나 정치적으로 검증이 안 된 분"이라고 했다. 그는 "문 후보의 참여정부 실정 비판은 정치적 진실에서 이탈했다. 정당한 평가를 해야지 정치적 선동이 되면 안 된다"고 비판했다. 그는 "참여정부 평가의 관점에서 본다면 참여정부 지지자들이 문 후보를 지지하는 것은 자기 부정이 될 수 있다"며 비판했다. 그간 정동영 후보에게 반감을 가진 일부 친노세력이 문국현 후보의 지지층으로 옮겨갈 수 있다는 관측이 줄곧 제기된 걸 의식했다는 의견도 있다.[26] 2008년 무소속으로 18대 총선에서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대변인인 한나라당 주호영 의원과 수성구 을에서 대결하여 낙선했다. 그는 "유연한 진보정당을 만들겠다"고 밝혔고 민주당을 탈당하였다. 그는 민주당은 당내에서 노선경쟁을 할 수 있는 정상적인 의사결정구조가 존재하지 않으며 전당대회를 열어 노선경쟁을 하게 되면 당은 필연적으로 파열한다고 했다. 이러한 구조는 변화가 불가능하며 그러므로 신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를 위해 2년후 지방선거, 2년후 국회의원 선거, 6개월후 대통령 선거를 거치며 신당을 만들어 나간다는 5년 구상을 밝혔다. 2009년 4월 21일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를 '이명박 정권의 전임 대통령 모욕주기 공작'으로 규정하면서 "전쟁포로라 할지라도 적장에 대해서까지 이토록 졸렬한 방법으로 모욕을 줘선 안된다"라고 주장했다.[27]4월 30일 오전 노 전 대통령의 검찰 출두에 앞서, 김해 봉하마을 사저를 방문해 기자들과 만나 "졸렬한 정치 보복"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옛날에는 군인들이 정치를 했는데, 요즘은 검사들이 정치하는 것 같다"며 "피의자로서 가는 것이니까, 피의자로서 잘 대처를 하고 와야 한다"며 "이런 정치보복을 노 전 대통령이 잘 이겨내고 오길 바란다"고 말했다.[28] 2009년 11월 10일 유시민은 당시 창당준비위원회를 이끌던 권태홍, 천호선, 이병완 등의 설득으로 국민참여당 창당에 함께하게 되었다. 2010년 5월 13일 민주당 김진표 후보와의 단일화 경선에서 승리하여 단일 후보가 된 후, 민주노동당 후보와 2차 단일화에 합의하며, 단일 후보가 되어 이변이라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29] 5월 24일 유시민은 서울 동교동 김대중 도서관을 방문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을 만난 자리에서 "김 전 대통령 비판을 사과한다"며 "시사 평론할 때 김 전 대통령을 몇 차례 비판했던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정부에 있어보니 김 전 대통령이 얼마나 힘든 과정을 뚫고 거기까지 이뤘는지 알 것 같았다"며 말했다. 그는 이어 "김 전 대통령이 살아 있을 때 말씀드리고 싶었다"며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대통령이 돼 IMF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기초생활보장제도를 도입해서 복지국가로 나아가는 초입을 만들었고, 남북관계도 분단 50년 만에 새로운 길을 열었다, 큰 업적을 이뤘다"고 강조했다.[30] 2010년 6월 2일 제5회 지방선거에서 경기도지사 야권 단일 후보로 나서 김문수 당시 경기도지사와 승부를 펼쳤으나, 4%차로 낙선했다.[31] 유시민은 당내 의사결정과정을 거쳐 민주노동당과의 합당을 결의한 후 2011년 12월에 이정희, 심상정, 노회찬, 조승수 등과 함께 통합진보당을 창당했다. 이후 통합진보당 공동대표에 취임했다. 2012년 1월 말, 유시민은 통합진보당 내 특정 계파의 패권주의를 비판하며 한동안 당무를 거부했다가 복귀했다.[32] 2012년 10월 21일 진보정의당이 창당되었고 유시민도 진보정의당 구성원으로서 참여했으나[33] 2013년 2월 19일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정계 은퇴 이후여러 TV 프로그램에 출연하였는데, 2016년부터 JTBC 썰전에 진보 진영을 대표하는 역할로 출연하고 있다.[34] 보수 진영을 대표하는 전원책 변호사와 사회자 김구라와 함께 출연하였으나 2017년 6월 29일 방송을 끝으로 하차한 전원책에 이어 이명박 정부에서 정무수석을 지낸 박형준이 출연하고 있다. 2018년 9월 26일 노무현재단 이사장에 내정되었다. 4년 6개월간 이사장을 맡았던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사퇴하고 유시민을 차기 이사장으로 추천했다.[35] 10월 15일 제5대 노무현재단 이사장에 취임했다. 2019년 1월에는 팟캐스트 채널 <유시민의 알릴레오>를 열고 방송을 시작하였다.[36] 해당 방송은 유튜브 채널 <사람사는세상노무현재단>과 팟캐스트 채널 <유시민의 알릴레오>에 업로드된다. 방송 하루만에 <사람사는세상노무현재단>의 구독자 수가 10만에서 43만으로 급등했다.[37] 일부에서는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인 <TV홍카콜라>와의 대결 구도(?)로 평가되기도 한다.[38] <유시민의 알릴레오>는 전문가를 초청해 현안을 이야기한다는 <알릴레오>와 '가짜뉴스'를 정정한다는 <고칠레오>로 구성된다. 문정인 통일외교안보특별보좌관이 출연한 영상은 조회수 265만 회를 기록하였다. (2019년 1월 19일 기준)[39] 논란성폭력 옹호2002년 대선기간에 발생한 개혁국민정당 성폭력 사건에서 해일이 몰려오는데 조개 줍고 있냐는 발언을 해서 논란이 되었다. 성폭력 사건에 대한 조사 필요성을 경시하였을 뿐 아니라 개혁국민정당에 위기가 몰려오고 있는데 성폭력 사건을 조사해 여성표 좀 얻어보려는 거냐 하는 뜻으로 성희롱적으로 받아들여졌다[40]. 이라크 파병에 대한 말 바꾸기2003년 3월 18일 유시민은 개혁당원들과 함께 파병반대운동을 펼치면서 "우리 국민들이 나서야 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으로 하여금 우리 국민들이 원하지 않기 때문에 이라크 전쟁에 파병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도록 확실한 명분을 쥐어주어야 합니다. 이라크 다음은 북한입니다. 우리 국민들 가운데 인간방패를 자임하며 이라크로 떠난 분들이 있습니다. 미군이 영변 핵 시설과 평양을 폭격한다면, 저도 인간방패가 되어 북으로 갈 작정입니다. 여기 고양시에 앉아서 죽으나 영변에서 죽으나 죽기는 매일반 아니겠습니까. 저마다 가슴속에 작은 소망의 촛불을 켭시다. 그 불빛을 모아 반전평화의 길을 밝히는 거대한 횃불을 만듭시다" 라고 말하며 파병을 반대했다. 하지만 후에 다시 입장을 바꿔 이라크 파병을 찬성했다. 특히, 김선일씨가 인질로 잡힌 채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는 상황에서도 "사람 하나 죽는다고 국가가 정책을 바꿔야 하느냐?"며 파병을 당위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16대, 17대 선거법 위반 혐의16대 총선 때 사전선거기간 전에 자신을 지지해달라는 홍보를 했다가 선거법 위반으로 피소되었다. 2006년 그는 곽치영 민주당 의원이 의원직을 상실해 열린 4·24 재선거에서 개혁국민정당 후보로 출마하며, 공식 선거운동기간(4월8일~23일) 전인 3월 29일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덕양 갑 전황보고'라는 제목으로 "지금 (한나라당) 이국헌 후보가 10% 넘게 앞서고 있다"며 "선거지역에 살고 있는 친지들을 찾아내 전화를 걸고 직접 방문, 저를 도와달라"는 등 지지를 호소했다.[41] 제16대 총선 당시의 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해 대법원 1부(윤재식 대법관)는 25일 판결문을 통해 "피고인은 선거운동 기간 전에 지지율을 공개하며 자신의 지지를 호소하는 내용의 글을 인터넷 홈페이지에 게시했는데, 이는 선거에 관한 단순한 의견 개진 및 의사표시, 정당의 후보자 추천에 관한 단순지지 또는 반대의견 개진 범위를 명백히 벗어난 것으로 당선을 위한 적극적 선거운동에 해당한다"고 밝혔다.[41] 대법원은 또한 "지난 3월 개정된 선거법은 선거운동기간에 관계 없이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선거운동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개정법 전 행위에 대해서는 벌칙에 대해 개정 전 규정을 따라야 한다"고 덧붙였다.[41] 또, 17대 총선거 이후에도 선거법 위반으로 다시 피소되었다. 2007년 4월 17대 총선 당시 소형책자 홍보물에 일명 '서울대 민간인 감금 폭행 사건'에 대해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명예회복됐다"는 허위사실을 기재해,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검찰에 불구속 기소되었다.[42] 검찰은 그보다 전인 2006년 10월 그를 기소하면서 기소 사유로 "유 의원을 포함해 당시 사건 가담자 모두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된 적이 없어 기소했다[42]"고 이유를 밝혔다. 이때 이 변호사는 "유시민은 직접 폭행에 가담하지 않고 주 가담자들이 도피해 있는 동안 사후처리에 주력했던 것으로 안다"며 "유 선배는 당시 피해자인 전모씨를 병원으로 후송하고, 책임을 가려야 한다는 등 수습책을 마련을 했던 것으로 안다"고 주장했다.[42] 또 "당시 유 선배가 같이 기소된 것을 보고 의아해 했었다"며 "학생회 주요 간부들이 도망가 있는 상황에서 유 선배를 희생양으로 엮으려는 것 아니냐는 얘기를 했었다.[42]"며 "당시 전씨에 대한 폭행.감금.고문은 모두 사실로 당시 1년6개월간 복역하며 뼈아픈 반성을 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라며, 특히 "당시 전씨가 방송통신대학 법학과 4학년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때 법조인의 꿈이 무참히 좌절되고, 가해자는 변호사, 대학교수, 국회의원이 되는 등 (그들이) 사회적으로 성공한 모습이 자신과 대비되는 모습을 봤을 때 전씨의 원한을 충분히 이해한다"며 "유 선배도 과중한 책임을 졌고, 고통을 받아왔기 때문에 전씨도 너그러이 이해해주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42]"고 변론했다. 서울고법 형사10부(이동흡 부장판사)는 21일 17대 총선 당시 허위사실을 공표한 혐의(선거법 위반)로 1심에서 벌금 50만원이 선고된 열린우리당 유시민 의원에 대한 항소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43] 당시 서울고법 재판부는 "피고인이 인쇄물에 게재한 '서울대 민간인 감금 폭행 사건 사건 관련자들이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명예회복됐다'는 내용은 허위사실에 해당하지만 피고인이 허위일 가능성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라고 밝혔다. 이어 서울고법 재판부는 유 의원이 후보자 정보공개 자료에 '전두환 정권이 조작으로 엮어 넣었다'고 적시한 것에 대해서도 "의견 표명에 불과하거나 전체적인 내용이 허위라고 보기 어렵다"며 원심대로 무죄로 판단했다.[43] 서기호 판사 비례대표 관련 당내 갈등통합진보당 유시민 공동대표는 서기호가 통합진보당 비례대표가 되는 것에 대해 반대했다. 이에 대해 이정희 공동대표는 유시민 대표와 갈등을 벌였다. 이정희가 사법 개혁을 내세우며 직접 영입한 서기호는 유시민의 검증 미비를 근거로 한 반대 때문에 비례대표에서 탈락했다.[44] 그러나 2008년 민주노총 조합원 성폭력 미수 사건 당시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는 의혹을 제기받은 정진후 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위원장은 영입했다고 당내 논란이 일어났다. 훗날 정진후는 성폭력 사건과 관련해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한편, 이에 대해 통합진보당의 한 관계자는 "개방형 비례대표 후보 영입은 전문성을 고려해야 하는 데, 서 전 판사의 탈락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해 서기호의 낙마를 놓고 당내 논란도 일어났다.[45] 항소이유서를 둘러싼 논란과 글짓기 실력
유시민은 무려 1년 6개월 실형이 나온 상해 범죄가 1심에서 선고된 후, 이에 대하여 불복하여 항소를 한 적이 있다. 그 당시 유시민이 쓴 항소이유서는 판사들도 돌려봤다는 세간의 루머가 있다[46]. 이에 대해 1심의 판결이유에 대한 쟁점별 불복사항은 전혀 없고 그저 자기 생각만 일방적으로 줄글로 지은 문장을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볼 판사는 없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늘 틀에 박힌 조서만 보던 판사들이 한 대학생이 재미있는 항소이유서를 제출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재미삼아 읽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일부 법조인들은 세간의 루머가 사실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또한 유시민의 최근 저서와는 달리 글이 다소 장황하다. 알릴레오 패널의 성희롱 발언2019. 10 1. 15. 유시민이 진행한 알릴레오의 ‘케이비에스 법조팀 사건의 재구성’이라는 편에서 패널로 출연한 아주경제 법조팀 장용진 기자는 케이비에스 ㄱ 기자를 언급하며 “ㄱ기자를 좋아하는 검사들이 많아서 (수사와 관련된 내용을) 술술술 흘렸다. ㄱ기자가 국정농단 때부터 치밀하게 파고들며 검찰과의 관계가 아주 넓어졌다. ㄱ기자를 좋아하는 검사들이 많아 많이들 흘렸다”고 말했다. ㄱ기자는 지난달 10일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부인 정경심 교수의 자산관리를 맡았던 증권사 직원 김아무개(37)씨를 인터뷰한 바 있다. 이어 장 기자는 또다른 패널인 방송인 황현희씨가 “검사와 기자의 관계로(좋아한다는 것이냐)”라고 묻자 “그럴 수도 있고, 검사가 다른 마음이 있었는지는 모르겠고 많이 친밀한 관계가 있었다는 것”이라고 거듭 말했다. 여성 기자의 취재를 놓고 인신공격에 가까운 폄하를 이어간 것이다[47]. 기타사항유시민의 조카, 즉 유시민의 누나인 유시춘 EBS 이사장의 아들 신모 씨는 마약류관리에관한 법률 위반죄로 2018. 10. 대법원으로부터 징역 3년 실형을 선고받고 확정되었다[48]. 학력경력
역대 선거 결과
작품저서
공저
텔레비전 드라마 대본
방송 출연
다큐멘터리
수상
가족 관계
같이 보기각주
참고 문헌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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