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당 (1967년)
신민당(新民黨)은 1967년 창당, 1980년 헌법 9호 부칙에 의해 해산되기까지 존재했던 대한민국의 정당이다.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 체제에서 제1야당으로 활동했다. 역사
역대 지도부
주요 선거 결과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
역대 전당대회민중당-신한당 통합 선언대회1967년 2월 7일 민중당과 신한당은 통합전당대회를 열고 양당통합을 만장일치로 선언하며 당명을 신민당으로 결정한 뒤, 당헌과 정강정책을 채택하고 대한민국 제6대 대통령 선거 후보에 윤보선 전 대통령, 대표위원에 유진오 고려대 전 총장을 추대했다. 신민당 제2차 전당대회1968년 5월 20일 신민당 전당대회는 총재를 중심으로 한 단일지도체제를 채택하고 유진오 대표를 총재로 추대했다. 신민당 제3차 전당대회1969년 5월 21일 신민당 전당대회는 유진오 총재를 재추대하고 건전한 자유민주정치 풍토의 구현과 대중경제체제확립을 위한 정강정책을 채택한 뒤 부총재를 4명으로 늘리되 총재가 임명토록하고 정무위를 두도록 당헌을 개정했다. 1969년 신민당 임시 전당대회삼선개헌 반대를 당론으로 하고 있던 중 7월말 성낙현,[2] 조흥만,[2]연주흠[3] 의원이 개헌 지지 성명을 발표하였다. 당시 헌법개정안 가결정 족수[* 1]는 117명 이었는데, 이 세 의원이 개헌안을 지지하면서 개헌안 찬성 서명의원이 122명이 되었다. 이에 신민당 유진오 총재는 9월 7일 긴급 전당대회를 열어 헌법개정지지성명을 낸 3명을 제외한 나머지 의원 44명을 제명하고 당을 해산함으로써 헌법개정지지성명을 냈던 의원의 의원직이 상실[* 2][4] 됐다. 무소속이 된 44명의 의원은 원내교섭단체인 신민회(新民會)를 구성하기로 합의하고 다음의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신민당 창당대회1969년 9월 20일 신민당 창당준비위원회는 창당대회를 열고 유진오 전 신민당 총재를 총재로 추대하고 유진산, 이재형, 조한백 전 신민당 부총재들을 부총재로 추대한 뒤 구 신민당의 당헌과 정강정책을 그대로 채택함으로써 신민당을 복원했다. 1970년 신민당 임시 전당대회1970년 1월 26일 뇌졸중으로 인한 유진오 총재의 사퇴로 열린 신민당 임시 전당대회는 유진오 총재의 사표를 수리한 뒤 총재직 대신 대표위원제와 정무회의를 두도록 당헌을 개정하고 대표 선거에 들어갔다.
1차투표에서 과반득표자가 나오지 않자 정일형 전 부총재는 이재형 부총재 지지를 호소하며 사퇴했고 결선투표 결과 유진산 수석부총재가 과반득표로 새 대표로 선출되었다. 이는 박정희 정권의 정치공작에 힘입은 것이기도 했다.[5]
신민당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 후보 지명대회1971년 신민당 임시 전당대회1971년 5월 8일. 진산 파동으로 인한 유진산 대표의 사퇴로 대표위원직이 공석이 되자 신민당은 대표선출을 위해 9월 20일 임시 전당대회를 열었다. 1차투표
2차투표
2차에 걸친 투표에도 과반득표자가 없자 김홍일 대표대행과 김대중 전 대통령 후보 간의 결선투표가 치러졌다.
9월 21일 결선투표 결과, 김홍일 대행이 김대중 의원을 꺾고 대표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진산계 전당대회와 반진산계 전당대회1972년 9월 26일 유진산이 이끄는 소위 진산계만으로 시민회관에서 전당대회가 강행되어 유진산 전 대표를 대표로 선출하자, 김홍일계, 김대중계, 양일동계 등 일명 반진산연합계는 효창동 김홍일 자택에서 단독 전당대회를 열고 김홍일을 대표로 선출함으로써 두 개로 쪼개졌다. 1973년 신민당 정기 전당대회분열 상태에서 10월 유신이라는 날벼락을 맞은 신민당은[6]11월 6일 김홍일 대표 측이 유진산 대표를 상대로 낸 직무정지 소송을 취하한 데에 이어 1973년 1월 23일 유진산 대표가 대표직을 사퇴함으로써 다시 통합되었고 5월 7일 통합 전당대회를 열어 2년임기의 총재직을 신설한 뒤 유진산 대표를 총재로 선출하고 민주헌정 회복 등 5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1974년 신민당 임시 전당대회1974년 4월 28일 유진산 총재가 서거하자 신민당은 8월 22일 새 총재 선출을 위한 임시 전당대회를 열었다.
1차투표에서 과반득표자가 없자 2차투표로 넘어갔는데, 그 과정에서 4위인 고흥문 후보는 김영삼 후보를, 5위인 이철승 후보는 김의택 후보를 각각 지지하며 사퇴하였다.
2차투표에서도 과반득표자가 없자 김영삼 전 원내총무와 김의택 총재대행 간에 결선투표가 진행될 예정이었으나, 김의택 대행이 사퇴함으로써 김영삼 총무가 총재로 선출되었다.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난동 사건1976년 5월 25일 새 총재 선출을 위한 신민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이 때,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은 참여 하의 개혁이라는 온건 노선을 내세운 이철승 국회의원이 당수로 선출되기를 바라고 정치공작을 수행하였다. 결국 차지철, 이철승의 사주를 받은 조직폭력배 김태촌은 조직을 이끌고 신민당 당사를 공격했다. 김영삼계 의원들은 김영삼과 함께 총재실로 대피해 바리케이드를 치고 버티자, 조폭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오자 창문으로 뛰어내렸고, 김영삼 총재는 다리가 부러져 병원에 실려갔다. 김태촌은 신민당 대의원 명단을 불태우고, 직인을 강탈했다. 얼마 뒤에 열린 전당대회에서는 다시 김태촌이 동원한 조직폭력배들이 전당대회장에 난입하여 각목을 휘둘러 김영삼 측 대의원을 전당대회장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막은 다음 비주류만의 전당대회로 이철승 의원을 대표로 선출했다. 이에 맞서 주류 측은 관훈동 당사로 가 역시 단독 전당대회를 치르면서 당은 두동강 났다. 결국 주류와 비주류는 이충환 의원을 총재대행으로 추대하고 전당대회를 다시 치르기로 합의한다. 1976년 신민당 임시 전당대회주류와 비주류의 합의로 다시 치러진 전당대회는 최고위원제를 도입하고 대표최고위원 선출에 들어갔다.
1차투표에서 과반득표자가 없자 2차투표가 진행되었는데, 정일형 후보가 이철승 후보를 지지하며 사퇴하자 결선투표가 되었다.
결선투표 끝에 신민당 전당대회는 이철승 후보를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했다. 1979년 신민당 정기 전당대회1979년 5월 30일 신민당 전당대회는 단일치도체제를 채택한 뒤 총재선출에 들어갔다. 총재 경선에는 7명의 후보가 난립했으나 김대중 전 의원의 권유로 조윤형, 김재광, 박영록 후보가 김영삼 후보를 지지하고 사퇴함으로써 김영삼, 이철승, 신도환, 이기택의 4파전이 되었다.
1차투표가 과반득표자 없이 2차투표로 넘어가자, 이철승 대표와 김영삼 전 총재는 각자 이기택 후보와 신도환 후보를 포섭하는 데에 주력했고, 이에 신도환 후보는 이철승 대표를, 이기택 후보는 김영삼 전 총재를 지지하며 사퇴함으로써 2차투표가 진행되었다.
2차투표 끝에 신민당 전당대회는 선명야당을 외쳐온 김영삼 전 총재를 총재로 선출하였다. 역대 정당 당원 및 당내 관련 사안같이 보기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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