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군(미법도) 납북어부 간첩 조작사건“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에서 발간한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중 6권을 주로 참고하였으며 이하에서는“국정원 진실위 보고서”로 약칭한다. 1965년 강제 납북되었던 강화군 및 미법도 주민들의 간첩사건1965년 인천 강화군에서 납북되었던 어부들에 대한 간첩사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65년 이외에 납북되었던 강화군의 어부들중 간첩으로 조작된 사건도 다수 존재한다.
( )안의 나이는 1965년 납북 당시의 나이임.
오형근사건강화군에서 발생한 납북어부 간첩사건의 첫 번째 희생자는 오형근이다. 5건의 1965년 강화도 납북어부 간첩사건중 유일하게 미법도 주민이 아닌 볼음도 거주자였다. 그러나 당시의 자료도 거의 발견할 수 없고 재심도 신청한 사실이 없어 구체적 내용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다만 오형근에 대한 수사당시의 발언을 근거로 두 번째 희생자인 안장영이 탄생하게 된다. 오형근은 1965년 납북시 자신이외에도 안장영이 별도 수용되어 교육을 받았다고 진술한 것으로 되어있다.[2] 안장영사건
1심에서는 안장영 사형, 최정순 징역 15년이 선고되었다. 납북시기안장영은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총 3회에 걸쳐 납북된다. 첫 번째인 1962년에는 새우 잡이 도중 태풍을 만나 납북되었으며 1964년에 다시 납북된 후 마지막으로 1965년 함박도 조개잡이에서 세 번째 납북이 행해진다. 간첩의 증거안장영의 북한 공작원 접선, 밀입북, 금품 수수 혐의를 입증하는 유일한 증거는 무인포스트용으로 사용됐다는 종근당 제약 공병 하나와 역시 무인포스트용으로 사용됐다는 납작한 돌 1개, 그리고 1975년 인천 만석우체국에 15만원을 1년 정액 저금한 정액 우편저금 증서 1개뿐이었다.[3] 1965년 납북 당시1965년 11월 23일 치안국에서 작성한 ‘귀환어부 심문결과 보고’에 따르면 체북기간 ‘남, 여 구분 평양여관 4, 5층에 1개방에 각각 2명씩 수용되고 식사는 2층 식당에서 공동 식사하였으며 일체의 외출은 금지되고 단체행동을 하였’고 재북 기간 중 4회에 걸쳐 평양여관 5층에서 북한 심문관으로부터 연 4~5시간씩 개별심문을 하였다고 한다. 안장영은 안희천과 같은 방을 사용하였으며 황용윤은 정영과 같은 방을 사용하였다. 미법도 및 강화군에서 1965년 납북된 사람들 중 간첩으로 조작된 5인은 간첩사건 시기는 각각 다르지만 혐의는 1965년 납북 당시 북한 공작원과 접선, 특수지령을 받았다는 점이다. 이 중 안장영과 황용윤은 1965년 납북 이전에 이미 북한 공작원에 포섭되어 1965년에는 재교육을 받았다는 혐의이며, 오형근, 안희천, 정영은 1965년 평양에서 처음으로 북한 공작원에게 포섭되어 간첩교육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4] 1965년 납북 당시 같은 방을 사용한 안장영과 안희천을, 그리고 월북한 친척이 있던 황용윤과 정영을 간첩으로 조작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간첩활동안장영에 대한 공소사실에 따르면 안장영은 1962년 8월 8일 간황엽 소유 용인호로 새우 잡이를 나갔다가 오팔호 태풍으로 납북되었는데 평양여관과 평양제1여관 등에 수용되어 성명불상 지도원에게 신문과 교육을 받고 귀환했다고 한다.[5] 당시의 신문기사를 살펴보자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아주 낯익은 이름과 만나게 된다. 고문경관으로 알려진 이근안이 바로 그 사람이다. 5건의 강화도 간첩사건중 경기도경이 수사한 3건은 이근안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이며 나머지 2건은 이근안이 수사하다가 안기부에 빼앗긴 작품일 뿐이다. 안장영은 운이 없게도 세 번에 걸쳐 납북되었다. 이는 선박의 시설이 현재와 달리 열악한 당시의 상황에서 새우잡이배를 가지고 북한의 코앞에서 조업을 하다가 태풍 등을 만나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대공수사관과 안기부에게는 더 없이 좋은 먹잇감이었을 것이다. 이근안은 안장영이 1973년 11월 15일 밀입북하였다고 조작한다. 이때 5번째 주인공인 정영과 이근안은 함께 안장영의 현장검증에 참여한다. 정영은 당시 민방위 소대장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정영은 안장영이 무인포스트를 설치했다는 장소며 밀입북했다는 장소 등을 이근안과 함께 다니며 검증한다. 그런데 이 모든 내용이 5번째 주인공인 정영에게 다시 돌아가게 된다. 안기부에 구금된 정영은 1977년 이근안과 함께 돌아본 안장영의 현장검증을 토대로 동일한 루트로 밀입북하였다고 진술한 것이다. 재심1989년 12월 13년을 복역한 안장영은 가석방되었으나 3년 후인 1992년에 사망하고 만다. 이근안에 의한 고문 등을 사유로 재심이 신청되었고 2015년 최종적으로 부인 최정순과 함께 무죄가 확정되었다. 안희천사건
고문 등 가혹행위1977년 2월 이근안 등 경기도경 대공담당 경찰관들에 끌려간 후 8월 30일 구속영장이 발부되기까지 무려 185일 동안 불법 감금 상태에서 수사를 받았다. 또한 미법도를 거점으로 한 안장영, 안희천, 황용윤, 정영 등 납북귀환어부 사건은 모두 무전기나 난수표, 통신부호가 발견되기는커녕, 직접적으로 혐의사실을 입증할 만한 증거자료는 단 하나도 제시되지 않았다. 안희천 사건과 황용윤 사건은 현재 진실위에서 입수한 자료를 근거로 판단할 때 단 하나의 물증도 없이 오로지 당사자 및 관련자들의 진술만으로 사건을 수사, 기소, 판결했다.[8] 주요내용안희천은 1965년 강화도 납북어부사건 당시 평양에서 안장영과 같은 방에서 지냈다. 안장영과는 네 살 차이로 형제처럼 지냈으며 구속되기 직전까지 같은 배의 선원으로 함께 일하던 사이였다. 안장영이 구속된 이후 약 3개월 후 안희천도 구속되는데 역시 이근안이 연관되어 있다. 안장영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안희천의 혐의가 나왔고 이를 근거로 이근안은 안희천을 간첩으로 만든 것이다. 안희천은 2006년 사망하였으며 2013년에 재심에서 최종적으로 무죄판결을 받았다. 황용윤사건관련자
언론발표
안기부 과거사위 보고서 내용사건인지 경위1979년 2월 광주교도소에 간첩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수감 중이던 안장영에게서 입수된 첩보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979년 2월 작성된 당시 중앙정보부의 ‘간첩 용의자에 대한 첩보보고’에 따르면 1979년 2월 8일 중정으로 안장영을 소환해 관련 첩보를 받았으며 그 내용은 안장영이 1965년 10월 함께 납북되었던 미법도 주민 이옥분에게서 1965년 체북 당시 ‘북괴군인 복장을 한 남자 1명이 당시 미법도 거주 황용윤을 찾아왔는데 아무래도 그 북괴 군인이 6.25당시 같은 동네에 살던 얼굴이 익은 황용윤의 형인 것 같았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11] 또한 1970년 1월 미법도에 간첩선으로 추정되는 쾌속선이 나타나고 수상한 자가 있다는 신고가 접수되었을 당시에 미법도에 거주하고 있었고 1973년경 경기도 김포에 땅을 사서 전 가족이 이사했던 점과 1965년 10월 납북당시 안장영에게 함께 조개잡이 가자고 선동한 것은 황용윤이라는 점 등을 근거로 황용윤에 대한 수사가 개시되었다. 1차 내사 결과중정은 1979년 3월 황용윤을 연행 심사할 계획을 세우지만 상부의 지시로 연행조사를 하지 않고 동향 파악에 주력한다. 1979년 8월 작성된 중정의 ‘간첩용의자 황용윤 내사 종합검토’에 따르면 ‘용의사실중 1965.11 납북, 평양여관 수용 당시 같이 납북되어 동 여관에 분리수용 중이던 동리 거주 이옥분이 전시 황용익이 본명을 방문, 접촉하는 것을 목격하였다는 것은 북괴의 비밀공작원칙에 위배(보안노출)되고’, ‘미법도에서는 이미 본명이 거동수상자로 황용익과 접선하였을 것이라는 소문이 있기 때문에 이는 공작원으로서의 자격이 희박’하다고 분석하고 있다. 즉, 중앙정보부 상부에서는 지부의 첩보보고에도 불구하고 황용윤의 간첩혐의를 높게 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2차 조사이러한 사건의 경과에도 불구하고 중정은 2년이 경과한 1981년 12월에 동일한 내용을 근거로 황용윤 등을 전격적으로 연행하여 수사한다. 불법연행 및 장기구금안기부 내부 자료에 의하면 황용윤 등이 1982년 1월 25일 구속되기까지 최대 47일간 불법 장기 구금되었다. 황용윤 사건에서는 총 14명이 불법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3명이 구속되고 2명이 불구속되었는데 황용윤은 47일간, 한금분은 44일간, 황순애는 37일간 불법 구금되어 조사받았다. 정영사건관련자
정진구는 정영의 7촌 숙부로 강화도 교동에 살다 정영이 9살 때인 6.25 동란 중 월북하였는데 정영은 정진구의 얼굴도 모르는 사이였다. 언론발표 내용
간첩혐의의 물증정영이 정진구를 접선, 금품수수, 밀입북했다는 유일한 증거는 1969년 정진구에게서 받은 공작금을 앞에 놓고 절을 한 후 안에 싸서 보관했다는 강화도 미신인 별상마님 모자와 별상마님 옷, 이를 쌌던 한지 한 장, 그리고 그 안에 들어있었던 100원권 지폐 한 장 뿐이다. 더구나 이 옷은 당시의 것은 낡아서 버리고 새로 마련한 것이며 이를 싼 한지 역시 최근에 교체한 것이고 공작금은 공소사실에서 500원권 지폐로 명시되어 있었으므로 100원권 지폐는 공작금의 일부조차 아니다.[13] 1차 조사정영과 정진영 등은 1982년 2월 국가안전기획부(1981년 중앙정보부에서 명칭 변경, 일명 안기부) 본부에 연행되어 수사를 받고 무혐의로 방면되는 일이 있었다. 당시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던 안장영으로부터 나온 첩보에 따르면 ‘1970년 1월 미법도에 북괴 공작선 및 공작원이 침투했을 때 외진 곳에 위치한 상여보관 창고에서 정진영이 서성거리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는 이야기를 건너 들었다’는 것이었다. 이 내용은 이미 1979년 경기도경이 첩보를 입수하여 위 발언을 한 사람에 대한 조사를 마치고 신빙성이 없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었다. 안기부 본부는 1982년 2월 동 내용을 가지고 정영 등 10명을 연행하여 최소 4일에서 최대 12일까지 조사한 후 무혐의 방면 처리한다. 당시 조사과정에서 정영, 정진영 등이 정진구의 남파 및 밀입북 사실을 자백했다가 곧 진술을 번복한 사실이 안기부의 내부보고서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안기부는 이 진술에 신빙성을 문제 삼으며 정영이 심리적 압박감에 못 이겨 허위진술을 한 것으로 잠정 결론을 내렸으며 정진영도 월북한 동생인 정진구 때문에 조사와 당국의 감시를 받고 있어서 자신의 허위자백으로 가족이라도 풀려나길 바라며 허위 진술했다고 허위진술 이유를 밝혔음을 기록하였다. 이에 따라 안기부 본부는 정영과 정진영을 방면조치하며 대공협조자로 활용할 것을 제안했다. 1983년 안기부 인천지부의 재수사1982년 2월 안기부 본부의 1차조사후 1년이 경과한 1983년 10월경 안기부 인천지부는 정진영에 대한 새로운 첩보를 근거로 정영 등 6명을 검거 수사한다. 첩보의 내용은 미법리 이장이 순시중인 경찰서장에게 ‘이곳은 낮에는 대한민국이고 밤에는 인민공화국이다’라고 말하였는데 이를 근거로 안기부 인천지부는 집중 내사를 벌여 미법도 주민들로부터 정진구가 수차 침투하였고 정영 등이 남파간첩 정진구와 연계된 정황진술 등을 확보하였다는 것이었다. 또한 정진영의 처가 1970년경 ‘밤이 되는 것이 원수 같다’고 한 말과 정진영 등이 농업에 종사하면서 1964년부터 1971년까지 많은 농토 구입 등 ‘자금 출처 의심’된다는 것이 주요한 첩보중 하나였다. 그러나 실제 검찰에 제출된 안기부 수사기록상에는 정진영의 농토 구입문제 등은 전혀 조사한 바가 없으며 오히려 농토 구입 문제가 제기되어 공작금 수수의 정황적 증거로 확정된 것은 정영의 경우였다. 더군다나 안기부 본부는 1983년 10월 안기부 인천지부가 올린 수사결과에 대하여 정영, 정진영 등의 진술이 1982년 안기부 본부에서 했던 진술과 달라지는 점, 피의자들의 자백 이외에 아무런 증거가 없는 점 등의 이유로 공소유지 가능성에 대해 심각하게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음을 검토의견으로 통보하며 정황증거라도 명확히 할 것과 간첩활동 내용이 통상적인 방법이 아니므로 일반적인 방법으로 보완할 것 등을 시정하도록 지시한다. 불법연행 및 장기구금안기부의 ‘임의동행보고’에는 정영 등의 임의동행 날짜가 조작되어 있으나 정영의 주장과 안기부 인천지부의 보고서 상에 수기 작성된 메모들에 의하면 정진영과 황정임은 45일간, 정영은 38일간 불법 구금되었음이 확인된다. 또한 정영 사건 관련자들은 상고이유서, 탄원서, 진정서 등의 문서 및 진실위와의 면담에서 일관되게 1982년 안기부 본부에서의 수사와 1983년 안기부 인천지부에서의 수사 과정에서 고문 및 가혹행위가 있었음을 진술하고 있다. 이는 곧 허위자백 강요로 이어진다. 정영 사건의 당사자인 정영과 황정임 및 정영의 처인 황문자 등은 고문에 못 이겨 허위 자백하였음을 증언하였는데 허위자백이 이루어진 후에는 상호간에 진술이 일치되지 않는 지점을 일치시키기 위해 수차례에 걸쳐 자필진술서를 고쳐 썼으며 나중에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혼란스러울 정도였다고 진술하였다. 이는 안기부 인천지부에서 작성된 피의자신문조서와 진술서를 통하여 어느 정도 확인이 가능하다. 즉 작성일자없이 1회, 2회, 3회의 순서만 적혀 있는 신문조서와 진술서는 검찰에 제출한 각 회차 피의자신문조서 및 진술서와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세부적인 내역에서는 각 회차별 진술내용이 전혀 다른 내용으로 기재된 부분이 발견된다. 또한 정영이 받은 공작금이 1,000원권 지폐로 기재되어 있으나 검찰제출 신문조서에는 동일한 액수의 500원권 지폐로 수정되어 있다. 1,000원권 지폐가 발행된 것은 정영이 공작금을 수령했다고 한 시기를 경과한 1975년이기 때문이다. 이는 황문자의 진술서에도 나타나는데 지폐를 1,000원권 두뭉치에서 500원권 두뭉치로 바꾸면서 공작금 총액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고문 및 가혹행위 등정영은 국정원 진실위와의 면담에서 고문사실을 진술했다. “1983년에는 수시로 발가벗겨서 구타, 잠 안 재우고 벌세우기, 야전 침대 다리로 구타 등 별의별 고문을 다하여 죽기 살기로 반항하자 두 사람이 팔을 붙잡고 엎드려놓고 구타해서 엉덩이가 터져서 팬티가 다 물들도록 피를 흘리기도 했다. 나중에는 손바닥이고 발바닥이고 다 퉁퉁 붓고 진물이 흘러서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견디다 못해 옥상에서 떨어져 자살하려고 소변보러 가는 척하다가 옥상으로 기어 올라가다가 잡혀온 적도 있었다. 그 이후에는 계속 수갑을 채워놓아서 밥도 개밥 먹듯이 먹고 소변도 소변통 가져다줘서 안에서 해결해야 했다” 또한 상고이유서에서는 7일간 잠을 재우지 않고 조사했으며 전기고문을 하겠다고 협박해서 수사관들이 시키는 대로 허위진술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호소했다. 이러한 고문은 정영 뿐 아니라 정영의 처 황문자나 정진영의 처 황정임, 정진영의 딸 정정희에 대해서도 행해졌다. 이는 허위자백을 강요하기위한 중요한 수단이었다. 정영의 경우 상고이유서에서 “안기부 수사관이 허위조작으로 불러주는대로 받아썼으며 받아쓰지 않을 경우 폭력으로 유린을 당했다”고 주장했으며 안기부 수사관이 시키는 대로 하면 징역을 4~5년 주도록 하겠다는 회유를 받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정영이 옥중에서 작성한 탄원서에서는 “수사관들은 간첩이 되는 가정을 가르쳐주면서 나는 따라하면서 모든 것이 만들어졌습니다. 간첩이 되는 증거는 한 가지도 없습니다. 수사관들이 하라는 대로 무전교육은 아라비아 숫자로 한다고 하며 밤에 접선은 플래시로 깜박거려서 접선한다고 되어 있습니다.”라고 허위자백 과정을 진술했다. 즉, 이 진술에 따르면 정영을 간첩으로 교육시킨 것은 북한이 아니라 남한의 안기부인 것이었다. 6.25때 납북한 정진구의 남파여부와 정영의 밀입북 여부검찰의 공소사실에 따르면 정영의 간첩활동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7촌 당숙 정진구는 1954년부터 1975년 사이에 총 12회에 걸쳐 교동도와 미법도 등으로 남파되어 활동하다가 북으로 복귀한다. 이를 입증하기 위한 많은 참고인의 진술이 이어지는데 이중 정진구를 직접 보았거나 만났다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다만 돌아가신 시어머니가 정진구를 만났다는 소리를 들었다는 식이며 A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정진구가 B의 집에 다녀갔다는 소리를 B로부터 들었다고 진술을 받았으면서 정작 B에 대하여는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어떤 경우에는 피고인인 정영이나 정진영의 조사과정에서 참고인 조사 중 나온 정진구의 남파여부를 조사조차 하지 않기도 했다. 정진구의 남파후 활동에 대하여도 북한의 전형적인 공작이라고 보기에는 많은 허점이 들어나고 있다. 공소사실에 의하면 정영은 이미 1965년 북한에 납북되었을 때 포섭된 것으로 나오는데 아무런 접선조직도 없이 단순히 4년 후인 1969년 9월에 접선을 약속하는 등 일반적인 상식에 부합되지 않는 무리한 내용이 다수를 이룬다. 또한 공소사실에 따르면 정영은 1971년 8월 정진구를 따라 북한에 밀입북하여 밀봉교육을 받고 노동당에 입당한 후 복귀하게 되며 이 혐의 때문에 1심에서 사형이 구형되고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그러나 이를 입증할 물증은 하나도 없으며 피고인들의 자백과 참고인의 진술뿐인데 이 중 참고인의 진술은 단순한 정황증거이며 피고인들의 자백은 추후 안기부의 고문과 가혹행위에 의한 허위진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정영이 북한으로 월북한 루트에 대하여도 실제 간첩들이 이용하던 최단거리의 길이 아니었는데 사실 이 길은 1977년 미법도의 안장영 사건 당시 안장영이 무인포스트를 설치했다는 장소이며 밀입북했다는 루트를 그대로 진술한 것이다. 안장영 사건 당시 정영은 수사관 이근안과 함께 현장검증에 참여했었기에 그 당시 정황을 모두 인지하고 있었으며 안기부 조사과정에서 그 루트를 진술한 것이다. 그러나 안장영 역시 이근안의 고문으로 허위자백을 한 것이었기에 실제 간첩들이 월북한 루트가 아닌 경찰이 조작한 루트를 진술할 수밖에 없었고 정영 역시 이를 그대로 답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영의 밀입북후 행적도 의문이다. 공소사실에서는 정영이 밀입북해서 2박3일간 교육을 받고 다시 미법도로 돌아왔다고 되어있으나 짧은 입북기간 동안 제반 간첩교육을 받았을 뿐 아니라 1965년 피납시 견학했던 트랙터 공장 등 4개소를 다시 견학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물리적 시간 상 무리한 일정으로 보인다. 이에 대하여는 안기부 본부에서 합리적으로 보완할 것을 인천분실에 지시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혐의사실이 수정되지는 않았고 대신 보도 자료에는 초대소에서 7일간 묵으며 밀봉교육을 받았다고 발표하기도 했다[14]. 정영 등에 북한이 내린 지령은 오로지 미법도 인근 군-경 경비상황을 남파공작원에게 전달해 준 군사기밀 누설과 공작금 수수, 북한에 대한 고무, 찬양 그리고 남파공작원에게 은신처와 식사를 제공한 것뿐인데 미법도 인근 군-경의 경비상황과 경비초소의 위치, 지서와 면사무소의 위치 등은 미법도 주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더구나 1968년 정진구에게 누설했다는 군-경 배치상황은 배치된 군-경이 없다는 내용이었다. 또 다른 당사자인 정진영과 황정임이 누설했다는 정보는 이보다도 더 가치가 떨어져 안기부 본부는 ‘정진영, 황정임의 범죄내용과 간첩죄 적용 문제’에 관한 검토 보고서를 작성하여 인천분실에 내려 보내기도 했는데 이 문건은 정진영, 황정임의 죄가 구성요건 충족에 미흡한 상태라고 분석하였다.[15] 언론발표 내용에 있어서도 정진구를 북괴 노동당 연락부 부부장으로 명시하였으나 공소사실과 수사기록에는 이런 사실이 기재된 바 없으며 2박 3일의 입북일정이 7일간 교육받은 것으로 바뀌었고 수수한 공작금이 세 차례에 걸쳐 40만원이었으나 보도 자료에는 10배가 증가한 400만원으로 되어 있으며 각각 3만원과 5만원을 수수한 것으로 되어 있는 정진영과 황정임은 각각 100만원과 50만원을 수수한 것으로 바뀌어있다. 재심 및 손해배상정영사건에 대한 1심 판결은 1984년 4월 4일 이루어졌다. 그런데 1심의 1차 공판에서 3명의 피고인들은 모두 혐의를 부인하였다. 이에 검찰은 2차 공판부터 ‘국가안보상 중요사건’이라는 이유로 ‘증인 신문 시에는 피고인 및 그 가족들을 퇴정시키고 피고인 신문 시에는 상피고인들을 퇴정시키고 진술하게’ 해 줄 것을 재판부에 요청하였고 이후 재판은 비공개로 진행되었다. 이에 따라 각 피고인들은 다른 피고인들의 진술과 증인들의 진술내용을 듣지 못하는 상태에서 재판이 진행되었다. 더군다나 이들에 대한 가족 및 변호인의 접견도 금지되어 있었기에 피고인들은 어떠한 도움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재판이 진행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시작된 1심 1차 공판에서 피고인 모두는 각각 무죄를 주장한 것이다. 이는 ‘판사는 안기부나 검찰과 다르겠지’라는 순진한 믿음에서 나온 행동이었지만 재판부는 이를 반성의 기미가 없는 악질간첩으로 간주하며 결국은 비공개재판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후 안기부 수사관이 찾아와서 “시키는 대로 하면 징역을 4~5년만 주겠다”고 하고 국선 변호인도 “안기부에서 진술한 대로 진술하고 동정을 받으라”고 하여 정진영은 2차 공판에서, 황정임은 4차 공판에서, 그리고 정영은 5차 공판에서 혐의를 모두 시인하고 선처를 구하게 된다.
2011년 1월 재심사건에 대하여 검사가 대법원에 상고하였으나 대법원에서 검사의 상고를 기각하여 정영에 대한 재심결과 무죄가 확정되었다. 이렇게 이 사건이 끝나는 듯 보였다. 이제는 그간 국가의 불법행위에 의해 받은 손해를 보상받는 마지막 단계만 남은 듯 보였다. 정영은 2011년 7월 서울고법의 형사보상결정이 확정된다. 16년간 죄도 없이 구속되어 있었던 과거사에 대한 보상결정이었다.
2019년 12월 24일에 대법원은 손해배상 재심에서 정영의 승소를 선언한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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