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서 태어났으나 대전으로 이주하였다. 대전천동초등학교에서 처음 야구를 시작해 충남중학교를 거쳐 북일고등학교에서 당시 감독이었던 김영덕과 인연을 맺었다. 북일고등학교 시절 포지션은 유격수였다. 북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아대학교에 입학했으나 1학년 때 어려워진 가정 환경과 무릎 관절염으로 인해 야구를 포기하고 대학도 자퇴했다.[1]
동아대학교를 중퇴하고 방위병으로 복무했던 그는 병역을 마친 후 야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선수로서의 꿈을 이어가던 중, 북일고등학교 시절 은사이자 당시 감독이었던 김영덕의 주선으로 1987년 9월에 신고선수로 입단하였다.[2] 선수들에게 배팅볼을 던져주는 힘겨운 신고선수 시절을 보내고 이듬해 비로소 정식 선수로 승격됐는데 1989년 시즌 후에는 전년도 최다 선발승(14선발승) 투수 한희민[3], 포수 김상국[4], 같은 해(1989년) 입단한 투수 송진우[5], 내야수 장종훈[6]강석천과 함께 다이에 호크스 추계훈련에 참가했으며 다음 해에는 이정훈 등이[7], 1991년에는 양용모 등이[8], 1992년에는 지연규지화동 등이[9] 다이에 추계훈련에 참여했는데 이들 중 김상국이 1990년부터 주전포수를 맡았고 본인(한용덕)이 1991년 최다 선발승(16선발승), 장종훈이 1990년부터 3년 연속 홈런왕(타점왕까지 포함하여 2관왕)[10], 이정훈이 1991년부터 2년 연속 타격왕[11], 송진우가 2001년5월 10일두산전 선발승으로[12] 개인통산 6번째 100선발승(좌완으로 치자면 첫 번째)을 달성하는 등 기량이 발전하기도 했다.
다만, 김영덕 감독의 후임으로 부임한 사람이자 김 감독과 달리 소위 '미국통'이었던 강병철 감독이 부임하면서 일본과의 커넥션이 끊어지기도 했는데 역대 최고인 8연속 10선발승 이상(92~96년 13선발승 97년 14선발승 98년 10선발승 99년 17선발승)을 기록한 정민철과 포크볼의 황제 이상목, 고졸신인으로 들어와 아쉽게 규정타석을 채우지 못했음에도 3할을 치며 팬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은 박지상 (이상 94년)[13]을 끝으로 다이에 캠프 보이들이 대가 끊겼다.
1990년 시즌 전 일본 전지 훈련지에서 일본인 인스트럭터의 도움으로 여러 가지 변화구를 익혔고, 그 해 13승(8선발승)을 거두며 팀의 주축 투수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 멤버로도 활약했다.
아주 빼어난 선수였으나, 개인 타이틀 이력이 전무해서 무관의 투수왕이라고 불렸다.[14]2004년10월 12일에 자유계약선수(FA)로 풀리며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15]
한편, 앞서 본 것처럼 1991년 16선발승으로 최다 선발승을 기록했는데 역대 최다 선발승 투수 중 1983년장명부 (28선발승)(삼미)(인천)[16]1986년선동열 (17선발승)(해태)(광주)[17]1987년김시진 (21선발승)(삼성)(사직) 1988년한희민 (14선발승)(빙그레)(창원)[18]1989년박정현 (15선발승)(해태 이강철과 공동)(태평양)(마산 제주)[19]에 이어 역대 최다 선발승 투수 중 6번째 국내 전지훈련파였으나(마산)[20] 본인(한용덕) 이후 최다 선발승 투수는 대부분 외국 전지훈련파였고 홈런왕 중 국내 전지훈련파는 1985년김성한(해태)(삼성 이만수와 공동)(광주 제주)[21]1986년김봉연(해태) 1987년김성래 (삼성) 1991년장종훈 (빙그레) 1998년우즈 (OB)(창원)[22] 이들 5명이었다.
1988년김영덕이 빙그레 이글스 감독으로 부임하며 강병철이 수석코치를 맡았으며 이 과정에서 1990년 소위 '종신감독 파동' 등[32]빙그레 이글스 시절 북일고[33]와 비북일고 출신들 사이의 갈등이 있었고 강병철은 그 해 시즌 후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으로 갔다가 1994년에 한화 이글스의 감독으로 부임하며 북일고 출신들을 대부분 홀대나 퇴출시킬 계획을 세웠는데 이 과정에서 김상국, 이상군 등 대부분 북일고 출신 선수들은 강병철 때문에 다른 팀으로 강제 이적당하거나 은퇴식 없이 은퇴하는 등 선수 생활의 끝이 좋지 않았지만 그는 워낙 팀에서 독보적인 존재라 계속 잔류했고 소위 '종신 감독 파동'[34]이 있었던 1990년 시즌에는 페넌트레이스 1위를 달렸다가 후반기에 페이스가 떨어져 준플레이오프 2패로 탈락했으며 이 과정에서 시즌 후 김영덕과 불화가 있었던[35]김성갑, 고원부, 유승안, 한희민 등 대부분의 비북일파 출신들이 뒷날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되거나 방출되는 수모를 겪었다. KBO 리그에서 유일한 4타자 연속 홈런을 맞은 투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