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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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문(千字文)은 중국 남조 양(502~549)의 주흥사가 6세기 초반인 502~521년 사이에 양 무제의 명을 받아 지은 책으로, 모두 다른 한자 1000자로 1구 4자의 사언 고시 250구로 되어 있다. 동진 왕희지의 필적에서 해당되는 글자를 모았다고 하는데, 더 오래전에 중국 위나라 종요의 필적을 모은 것이라는 설도 있고 천자문을 종요가 손수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천지현황(天地玄黃)'으로 시작해서 '언재호야(焉哉乎也)'의 어조사로 끝나는데, 자연 현상부터 인륜 도덕에 이르는 넓은 범위의 글귀를 수록하여 한문의 입문서로 널리 쓰였다. 당나라부터 빠르게 보급되어 여러 판본이 만들어졌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왕희지의 7대손 왕지영이 진서와 초서의 두 서체로 만든 《진초천자본(眞草千字本)》으로 1109년에 새긴 석각이 남아 있으며 둔황에서 발견된 문서에 그 필사본이 많다고 한다. 송나라부터는 완전히 정착되어 《속(續)천자문》을 만들기도 하고 《서고천자문(敍古千字文)》과 같이 전혀 다른 글자를 이용한 새로운 천자문이 생기기도 했으며, 천자문의 순서를 이용해 문서 번호를 붙이는 풍습도 생겼다. (일자오결) 전설에는 주흥사가 무제의 명에 따라 하룻밤 사이에 만들어야 했으나 마지막 4자를 짓지 못하여 고심하고 있는데, 홀연히 귀신이 나타나서 어조사 언재호야의 마무리를 알려주었다고 한다. 완성한 후에 보니 머리털이 하얗게 세었다고 하여 "백수문(白首文)"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한국한편, 신라에는 법흥왕 8년(521년)에 중국 남조 양의 승려 원표가 사신으로 오면서 많은 불경과 《천자문》을 가지고 왔다고 한다. 천자문은 한문의 입문서로서 줄곧 중용되어 여러 가지 판본이 존재했고 훈민정음 창제 이후 한자마다 그 새김과 소리를 넣어 석음(釋音)을 붙여 간행되었는데, 그 가운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은 조선 선조 8년(1575년)에 광주에서 간행된 광주판 천자문이며, 현재 일본 동경대학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국에 가장 널리 보급된 것은 조선 선조 16년(1583년) 어명에 의해 명필 한호가 쓴 《석봉천자문(石峯千字文)》으로 여러차례 중간되어 왔는데, 현존하는 여러 판본중에서 경북 영주의 박찬성(朴贊成) 소장본과 일본 나이카쿠 문고(內閣文庫) 소장본이 원간본 혹은 이것에 가까운 판본으로 추정된다. 천자문 한자 중 교육용 한자 밖의 것은 250자이다. 내용
종요의 천자문주흥사뿐만 아니라 중국 위나라 종요(鍾繇)도 《천자문》을 남겼다. 주흥사의 책은 “天地玄黃”으로 시작하나, 종요의 책은 “二儀日月”로 시작한다. 지정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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