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정토계획
신라정토계획(新羅征討計劃)은 753년 경덕왕 12년에 일본에서 사신이 파견되었다가 무례함을 이유로 추방당하자, 일본의 권력자 후지와라노 나카마로가 신라를 대대적으로 침공하기 위한 계획이다. 해설한국연구재단 기초학문자료센터
인용
삼국통일 후 신라와 일본의 관계신라의 삼국통일 시기인 663년 일본은 백제 부흥운동을 지원할 목적으로 42,000명의 군대와 800척 이상의 함대를 파견했다가 백강 전투에서 대참패를 당하였다. 이후 한동안 일본은 오노성(大野城, 665년)[4]과 카네다 성(金田城, 667년)[5]을 축조하고 방어전쟁준비를 하는 등 당의 침략위협에 대한 공포에 시달렸다. 그러나 나당전쟁으로 인해 신라와 당의 관계는 매우 악화되었고 신라는 당나라의 전쟁위험이 존재하는 동안 후방의 위협을 제거할 목적으로 일본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720년까지 교류를 증진하며 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그동안 일본은 당의 율령체제를 모방해 국가체제를 정비하며(→701년, 다이호 율령) 천황중심의 일본식 중화사상에 입각한 대외이념을 표방하면서 신라를 자신들의 번국(藩國)으로 간주하는 야량자대(夜郞自大)적인 태도를 표출하기도 했다. 《일본서기》등이 편찬(720년)되면서 소위 진구 황후의 삼한정벌설이 조작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당시에 상승일로의 국세에 있던 신라로서는 이런 일본의 태도를 용납할 수 없었고 720년 경부터 두 나라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치닫기 시작했다. 동시에 일본의 무례한 태도도 도를 넘어 급기야 일본이 사신을 파견해 조공을 강요하다가 추방당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신라에서도 사신을 파견했다가 다자이후(太宰府)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결국 731년 (성덕왕 30년) 일본은 병선 300척을 동원해 신라를 침공했으나 패배하고 말았다.[6] 그 후 일본은 신라와 관계에 대한 대안으로 발해와 적극적으로 통교하기 시작했다. 발해는 일본 견당사의 호송을 목적으로 일본에 사절을 파견하기도 했다. 그 후에도 신라와 일본의 관계는 험악하게만 돌아가고 있었고 이런 양국간의 극한의 대립은 경덕왕대(742년 ~ 765년)에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집권기에 절정에 달해 있었다. 계획 및 준비755년 당시에 아시아의 초강대국이었던 당나라에 안사의 난이라는 대규모 내란이 발발했다. 이로 인해 당나라가 외부에 눈을 돌릴 틈이 없게 되자 이틈에 일본은 당나라의 영향력을 배제한 채 신라를 도모할 궁리를 했고 이는 후지와라노 나카마로 본인의 정치적 야심과 맞물려 진행되었다.[7] 이에 당시에 신라등의 외국과의 외교를 관장하는 관청인 다자이후에서 신라정벌을 목적으로 태제부조행군식(太宰府造行軍式)이라는 세부적인 계획안을 마련해 이를 실천하기 시작했다. 756년 일본조정은 호쿠부큐슈에 이토성(怡土城)을 축조했다. 여러 가지 축조기술을 동원해 견고히 건설된 성은 근방에 주선사(主船司)라는 관청과 용광로와 무기제조공장을 세우는 등 대규모의 병참기지로서 기능했다. 759년에는 3년후인 762년을 기한으로 호쿠리쿠도 · 산인도 · 산요도 · 난카이도 4도에 할당량을 제시해 500척의 전함을 건조하도록 지시한데 이어 761년에는 미노국(美濃國) · 무사시국(武藏國)에서 20명씩의 소년을 징발해 신라어 교육에 들어가는 등 준비는 유래가 없을 만큼 대규모적으로 진행되어 갔다.[8] 안사의 난을 정점으로 쇠퇴의 길을 걷고 있던 당나라와 마찬가지로 신라도 중대 후기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혼란스러운 정치 · 경제적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으나 일본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모벌성(毛伐城)에 노당(弩幢)을 증원하는 등 준비를 갖추었다. 경덕왕 대에는 군을 중앙의 6기정(六畿停)과 지방의 9주정(九州停)으로 재편하는 등 신속한 군대동원을 위한 군제개혁도 단행했다. 견발해사757년 일본은 신라에 파견되었다가 쫓겨난 경험이 있던 오노 다모리(小野田守)를 단장으로 처음으로 견발해사를 파견하기 시작해 759년과 760년에 연이어 발해에 사신을 파견했다. 일본이 발해와 적극적으로 교류한 원인은 신라가 일본과 발해 양국을 동시에 상대할 수는 없으리라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며 전쟁시엔 발해의 협공과 지원을 받아내기 위해서였다. 오노 다모리는 귀국길에 발해장군 양승경(楊承慶)이 인솔하는 발해사절단을 같이 데려왔고 일본 측은 양승경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면서 발해의 참전을 촉구했다. 그 후에도 신라침공일정이 짜여져 있던 762년, 고구려 왕실의 후손인 고마노 오야마(高麗大山)를 단장으로 견발해사를 파견했지만 발해는 견발해사에 대한 답례사신에 의례적으로 파견되던 무관을 대신해 문관인 왕신복(王新福)을 파견하는 것으로 일본의 신라침공계획에 사실상 거절의사를 표시했다. 당시 발해는 신라와 우호관계를 맺고 교류를 시작하고 있었기에 굳이 일본과 손잡고 신라를 공격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일본은 나카마로의 몰락 등으로 신라침략계획을 접을 수밖에 없었고 신라정토계획도 역사의 뒷편으로 사라졌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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