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朝光)은 일제강점기인 1935년 10월에 창간된 월간 잡지이다.[1]
개요
조선일보 자매지로서 1935년 10월부터 발간을 시작하였다.[1] 초기에는 순수 문예창작물 중심의 잡지였다.
일제 강점기 말기 방응모는 조선일보 폐간에 대비하여 조선일보사 출판부를 개편해 조광사를 설립하였다. 조선일보는 1940년 8월에 폐간되었고, 조선일보사 출판부가 발행하던 《조광》, 《여성》, 《소년》은 조광사가 발행하게 되었다. 이 가운데 《여성》과 《소년》은 1940년 12월에 폐간되었다.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이후에 친일 성향이 크게 증가했고,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에는 완전한 친일 잡지로 변모하였다. 이 시기에는 징병제 실시에 대한 감사, 근로 동원 고취, 일본어 상용 주장, 태평양 전쟁 찬양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 친일 문예 작품을 싣기도 했다. 이 시기 사설에서 일장기와 나치 독일 하켄크로이츠 깃발,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국기를 게재하고 이들 간의 군국주의 삼국동맹을 "인류 역사상 획기적 대사건"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2]
1944년 12월에 통권 110호로 종간되었다. 태평양 전쟁 종전 후인 1946년에 복간되었으나 1948년에 다시 종간되었다.
주요 필진
발행인은 방응모가 맡았으며, 주요 필진에는 다음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주요 논설과 기사
호수 |
제목 |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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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3월호 |
내선일체에 대한 이념 |
윤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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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5월호 |
내선일체와 총후청년의 임무 |
현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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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6월호 |
국민정신과 우리의 임무 |
현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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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9월호 |
근위내각의 신정책 |
함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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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10월호 |
조선통치 30년 소사(小史) |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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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12월호 |
일본정신의 정화(精華) |
김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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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12월호 |
우리들과 지원병 |
함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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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2월호 |
신체제와 이도선양(吏道宣揚) |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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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1월호 |
왜 미국을 치나 |
유광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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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1월호 |
제국해군의 위용 |
이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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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1월호 |
미일외교 80년사 |
이홍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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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1월호 |
대미·영전과 우리의 각오 |
주요한, 이종린, 김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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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1월호 |
성지참배통신 |
이석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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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2월호 |
선전일(宣戰日)의 교훈 |
방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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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2월호 |
전필승(戰必勝) 공필취(攻必取) |
유억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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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2월호 |
광명의 천지를 향하여 |
박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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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2월호 |
타도 동아의 공구자(恐仇者) |
방응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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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2월호 |
신성한 의무 |
여운홍
|
1942년 2월호 |
광휘의 일생은 이것 |
서은숙
|
1942년 2월호 |
총후여성의 힘 |
허하백
|
1942년 2월호 |
필승의 신념 |
정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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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2월호 |
여성의 무장 |
김활란
|
1942년 5월호 |
문학의 일본심(日本心) |
서두수
|
1942년 6월호 |
사상전·모략전·스파이 |
고원섭
|
1942년 8월호 |
징병제 실시에 감사합시다 |
(권두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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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9월호 |
1억 군민 총궐기 |
(권두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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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9월호 |
조선민족의 발전적 해소론 |
김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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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10월호 |
총후는 오로지 증산전에 |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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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10월호 |
미소기 연성회 참가기 |
김지효
|
1943년 12월호 |
보람 있게 죽자 |
최남선
|
1943년 12월호 |
뒷일은 우리가 |
김활란
|
1943년 12월호 |
천재일우의 때 |
이헌구
|
1944년 1월호 |
성수무강(聖壽無疆) |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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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1월호 |
승패를 결정하는 해 |
한상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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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1월호 |
대동아전쟁 3년 |
유광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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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6월호 |
고하(古賀) 원수를 따르라 |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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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8월호 |
국어를 상용합시다 |
편집부
|
1944년 8월호 |
이 시련을 극복하라 |
이창수
|
1944년 9월호 |
국민징용과 성업익찬 |
이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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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참고자료
-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2004년 12월 27일). 《일제협력단체사전 - 국내 중앙편》. 서울: 민족문제연구소. 537~540쪽쪽. ISBN 8995330724.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