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옹주 (1584년)
정혜옹주(貞惠翁主, 1584년 5월 2일(음력 3월 22일) ~ 1638년 12월 22일(음력 11월 18일))는 조선의 왕족이다. 선조의 차녀이자 서차녀로 인빈 김씨 소생이다.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의 고조모이기도 하다. 생애가계1584년(선조 17년) 음력 3월 22일 조선의 제14대 왕인 선조(宣祖)와 그 후궁 인빈 김씨(仁嬪 金氏)의 차녀로 태어났다[1]. 성은 이(李),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신성군(信城君), 원종(元宗, 인조의 아버지) 등의 친동생이며, 인조(仁祖)의 고모이다. 정혜옹주의 생모 인빈 김씨는 수원 김씨 김한우(金漢佑)의 딸로, 명종(明宗)의 후궁으로 있던 경빈 이씨(慶嬪 李氏)의 외사촌이었던 관계로 궁중에서 자랐다. 이후 선조의 후궁이 되어 가장 많은 총애를 받았으며, 또 선조의 자식을 가장 많이 낳았다[2]. 그러나 광해군(光海君)의 생모인 공빈 김씨(恭嬪 金氏)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3]. 옹주 시절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8세의 어린 나이에 피난 생활을 해야 하는 등 고생을 겪었다. 당시 《조선왕조실록》에는 정혜옹주가 나이가 어렸고, 피난길도 어수선하여 말 등을 준비할 수 없게 되자 선조가 옹주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피난을 간 후 무사히 난리를 피하면 큰 상을 내릴 것이라는 명을 내렸다. 이때 내수사(內需司)의 관원으로 있던 윤백상(尹百祥)이 자원하여 옹주를 황해도의 산 속으로 들어가 용케 적을 피하고, 그 해 겨울이 되어서야 의주(義州)로 들어갔다[4]. 이후 정혜옹주는 1596년(선조 29년) 해평 윤씨 윤방(尹昉)의 아들 윤신지(尹新之)와 혼인하였다. 이때 윤신지는 해숭위(海嵩尉)에 봉해졌다[5]. 사망정혜옹주는 병자호란이 발발한지 2년 후인 1638년(인조 16년) 사망하였다. 당시 왕실에는 정혜옹주 말고도 여러 왕족들이 죽었으나 그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있었는데, 당시 인조는 정혜옹주에 대해 예장(禮葬)을 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여러 대신들이 반발하였으나, 인조는 자신의 명대로 시행토록 하였다[6]. 현재 그녀의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으며, 남편 윤신지와 합장되었다[5]. 가족 관계정혜옹주는 윤신지와 결혼하여 아들 둘을 두었다[1]. 남편 윤신지는 품계가 정1품에 올랐으며, 글을 잘 짓고 서화에 능하여 장인인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7]. 게다가 두 아들까지 총명하여 한때는 많은 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두 아들이 자신보다 일찍 죽는 바람에 약 20여년을 은거하며 지내다가 1657년(효종 8년)에 죽었다[8]. 장남은 윤지(尹墀)이며, 차남은 윤구(尹坵)이다. 윤지는 광해군 때 사직하였다가 인조반정 후 여러 관직을 두루 지내고, 훗날 예조참판과 전라도관찰사, 경기감사 등을 지냈다. 또 글씨를 매우 잘 썼다고 한다[9]. 윤지의 딸이 김만기·김만중의 어머니로, 김만기의 딸이 숙종의 초비(初妃)인 인경왕후 김씨이다. 윤구는 이조정랑 등을 지냈으며,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종하였다[10]. 관련 작품드라마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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