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웅
김원웅(金元雄, 1944년 3월 8일 ~ 2022년 10월 30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제14·16·17대 국회의원과 제21대 광복회 회장을 역임했다. 생애중화민국 충칭에서 조선의열단원 김근수와 전월선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김구의 중매로 연을 맺었다고 한다. 해방이 되자 귀국하여 대전에 정착했다. 대전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 입학하였다. 중화민국 정부 장학금으로 타이베이시에 있는 국립 정치 대학 대학원으로 유학했다. 대학생 시절 박정희 정부의 한일기본조약 체결 반대운동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 1972년에 민주공화당 사무처 공채에 합격하여 민주정의당 당직생활을 포함 1990년 3당 합당 합류 거부시까지 18년여간 보수계열에서 정당생활을 했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생긴 민주자유당 합류를 거부하고, 박찬종, 노무현, 이철 등과 꼬마민주당(1990년)을 창당했다. 1992년 14대 총선에 출마하여 국회에 입성했다. 제정구, 이부영, 유인태, 원혜영 등 초선의원 12명과 함께 깨끗한 정치 실천선언을 하여 모든 정치인, 공직자의 재산공개, 정치자금공개를 주도했다. 1995년 일제잔재인 '국민학교' 명칭을 '초등학교'로 바꾸는 교육기본법 개정을 주도했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 지역주의 청산을 내세우고 꼬마민주당(1995년) 후보로 대전 대덕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낙선 후 노무현, 제정구, 유인태, 이철, 원혜영, 박석무, 김홍신 등과 ‘하로동선’(夏爐冬扇)이란 상호로 식당을 개업하고 대표는 김원웅이, 감사는 노무현이 맡았다. 1997년 (꼬마)민주당과 신한국당이 합당하여 한나라당이 되었고, 2000년 16대 총선에서 대전 대덕에서 출마, 충청권에서 유일하게 한나라당 당선자가 되었다.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민족화해협력 반대와 기득권층 비호의 노선을 정면으로 비판하며 당내 갈등이 심화되었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노무현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한나라당을 탈당하였다. 개혁국민정당을 창당하여 당대표를 하였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시절 비공개 특사로 평양을 방문, 민족평화축전 개최를 합의하고, 민족평화축전을 2003년 10월 제주도에서 마쳤다. 일제가 약탈해 간 문화재의 환수위원회를 결성하고, 평양직할시를 방문, 남북공조로 북관대첩비, 조선왕조실록 및 조선왕조의궤를 되돌려 받기도 했다. 2004 ~ 2006년 국회 윤리특별위원장을 맡았다. 2006~2008년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장으로 한미 자유 무역 협정에 임하면서 미국을 10여 차례 방문, 미국 의회와 국무부의 고위인사와 담판하여 스크린쿼터제를 지켜냈고, 개성공업지구 제품을 한미FTA에 포함시켰다. 반기문 UN사무총장의 선거대책위원장을 지냈다. 2007년 1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의지를 밝혔으나 실제 출마하진 못했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야4당 연합후보(민주당, 국민참여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로 대전광역시장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2011년부터 독립운동가들인 안중근, 윤봉길, 여운형, 신채호, 김성숙, 이회영 선생 등의 뜻을 기리는 20여 기념사업회들이 뭉쳐 항일독립운동가단체연합회[1]를 결성하였고 2011년 12월 15일부터 2017년 4월 3일까지 초대 대표를 맡았다. 강원도 인제군에 '허준약초학교'(사회적 협동조합)를 운영하며, 귀촌·귀농희망자에 대한 지원활동을 했다. 2019년 광복회 회장이 되었다. 친일 기득권 세력의 청산을 강경하게 주장하였고, 2022년 TV조선과 조선일보에 의해 비자금 조성 의혹이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사퇴하였다. 하지만 법원에서 비자금 조성은 김원웅이 아닌 횡령 제보자가 주도하였다는 판결을 받았다. 2022년 10월 30일에 암 투병 중 별세했다. 학력경력
수상
저서
역대 선거 결과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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