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북동로하북동로(河北東路)는 송나라에서 설치한 로중 하나로 지금의 허베이성 해안지대를 통치했다. 1073년(희녕 6년), 하북로가 동로와 서로로 분리되면서 형성되었다. 3부 11주 5군 57현을 두었다.[1] 정강의 변이후 본로를 점령한 금나라는 대명부일대를 분리해 대명부로에 소속시키면서 중심지를 하간부로 옮겼다.[2] 송대명부(大名府)대명부참고 개덕부(開德府)상급부로 전연군(澶淵郡) 진녕군절도(鎮寧軍節度)를 두었다. 1105년(숭녕 4년), 전주(澶州)에다가 북보를 두었다. 1106년에 부로 승격되었다. 1120년(선화 2년), 보군을 파하고 하북동로에 소속시켰다. 숭녕연간에는 31,878호 82,826명의 주민들이 살았다. 낭유석(莨莠席), 남분(南粉)을 공납으로 바쳤다. 7현을 두었다.
창주(滄州)상급주로 군명은 경성군(景城郡)이다. 매해군절도(橫海軍節度)를 두었다. 숭녕연간 65,851호 118,218명이 살았다. 대견(大絹), 큰 버드나무로 만든 상자를 공납으로 바쳤다. 5현을 두었다.
보순군(保順軍)후주에서 창주 무태현에남쪽 30리에 설치했다. 970년(개보 3년), 창주와 태주(棣州)2주의 경계의 보순진과 오교진의 땅을 추가확장했다. 하간부(河間府)상급부로 군명은 하간군이다. 영해군절도(瀛海軍節度)를 두었다. 997년(지도 3년)에 고양을 순안군에 소속시켰다. 976년(태평흥국 원년)에 고양현을 고양관으로 개명했다. 1048년(경력 8년)에 처음으로 고양관로안무사(高陽關路安撫使)를 두고 영주(瀛州), 막주(莫州), 패주(貝州), 기주, 창주, 영주(永州), 정주(靜州) 보정, 건녕, 신안의 10개주군을 관할했다. 비단을 공납으로 바쳤다. 영주는 본래 석경당이 요나라에 할양한 연운십육주중의 하나였으나 송나라건국 이전 후주 시영이 요나라에게서 수복했다. 수복후에 송나라는 영주에 방어를 두었는데 1108년(대관 2년)에 부로 승격시키고 군명을 폐했다. 숭녕연간에는 31,930호 60,206명이 살았다.
박주(博州)상급주로 군명은 박평군(博平郡)이다. 방어를 두었다. 992년(순화 3년), 황하의 유로가 바뀌자 치소를 효무도의 서쪽으로 바꿨다. 숭녕연간에는 46,492호 91,333명의 주민들이 살았다. 비단을 공납으로 바쳤다. 4현을 두었다.
체주(棣州)상급주로 군명은 낙안군으로 방어를 두었다. 961년(건륭 2년), 단련을 두었다가 방어로 바꿨다. 1018년(대중상부 8년)에 양신현 경계에 있는 팔방사로 치소를 옮겼다. 숭녕연간에는 39,137호 57,234명이 살았다. 비단을 공납으로 바쳤다. 3현을 두었다. 염차현에 치소를 두었다.
막주(莫州)석경당이 요나라에게 할양한 연운 16주중 하나였지만 후에 송나라가 수복하였다. 상급주로 군명은 문안군(文安郡)이다. 방어를 두었다. 1073년 장풍현을 진으로 격하하고 막현을 임구현으로 통폐합시켰다. 1087년(원우 2년), 막현을 복구했다가 진으로 격하했다. 숭녕연간에는 14,560호 31,992명이 살았다. 면섬유를 공납으로 바쳤다. 1현을 두었다.
웅주(雄州)중급주로 방어를 두었다. 당나라 탁주의 와교관(瓦橋關)이 있었다. 석경당이 거란이 연운십육주를 할양할 때 같이 거란에 넘어갔다가 귀신현이 수복되었다. 1113년(정화 3년), 역양군이라는 군명이 붙었다. 숭녕연간에는 13,013호 52,967명이 살았다. 고(槹)를 공납으로 바쳤다. 2현을 두었다.
패주(霸州)중급주로 방어를 두었다. 당나라가 유주 영청현에 익진관을 세웠다. 후주가 패주를 설치하고 막주의 문안현과 영주의 목성현을 내속시켰다. 정화 3년, 영청군이라는 군명을 붙였다. 숭녕연간에는 15,918호 21,516명이 살았다. 견직물(絹)을 공납으로 바쳤다. 2현을 두었다. 치소는 랑팡 시 바저우 시에 두었다.
덕주(德州)상급주로 군명은 평원군이다. 군사(軍事)를 두었다. 송나라초에 귀화현을 폐했다. 1035년, 안층현을 장릉현에 통폐합시켰다. 그리고 영정군(永靜軍)에 이관시켰다. 1073년(희녕 6년)에 덕평현을 진으로 격하하여 안덕현에 통폐합했다. 숭녕연간에는 44,591호 82,025명이 살았다. 견직물을 공납으로 바쳤다. 2현을 두었다.
빈주(濱州)상급주로 군사를 두었다. 대관 2년에 발해군이란 군명을 받았다. 1012년(대중상부 5년), 포태현(蒲台縣)을 폐지했다. 숭녕연간에는 49,991호 114,984명이 살았다. 견직물을 공납으로 바쳤다. 2현을 두었다.
은주(恩州)하급주로 군명은 청하군이었다. 군사를 두었다. 당나라는 이곳에 패주(貝州)를 두었고 후진 영청군절도를 두었다. 후주에선 방어를 두었다. 송나라가 건국된 후 절도를 복구했다. 1048년(경력 8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주명을 바꿨다. 견직물과 흰담요(白毯)를 공납으로 바쳤다. 3현을 두었다.
영정군(永靜軍)동하(同下)급주로 당나라에선 경주(景州)를 두었다. 981년, 군을 대명직할에 두었다. 순화 원년에 기주 부성현(阜城縣)을 내속했다. 경덕 원년, 군명을 지금의 이름으로 바꿨다. 숭녕연간에는 34,193호 39,022명이 살았다. 견직물을 공납으로 바쳤다. 3현을 두었다.
청주(淸州)하급주로 본래 군명은 1113년에 지어진 건녕군(乾寧軍)이었다. 유주 노태군(蘆台軍)의 땅이었으나 석경당이 거란에 연운16주를 할양할 때 같이 거란에 이속되었다. 후주가 이곳을 수복하고 3개의 관을 설치하면서 영안현(永安縣)을 설치하여 창주에 소속시켰다. 태평흥국 7년 군을 설치하고 현을 건녕현으로 개명시켰다. 대관 2년, 주로 승격시켰다. 숭녕연간에는 6,619호 12,078명이 살았다. 견직물을 공납으로 바쳤다. 1현을 두었다. 조대채(釣台)、독류북채(獨流北)、독류동채(獨流東)、부성채(當城)、사와채(沙渦)、백만채(百萬)의 6개채가 있었다.
신안군(信安軍)동하급주로 981년, 패주의 어구채(淤口砦)에 파로군(破虜軍)을 두었다. 경덕 2년에 신안군을 두었다. 숭녕연간에는 715호 1,437명이 살았다. 견직물을 공납으로 바쳤다. 1081년(원풍 4년)에 패주에서 내속된 녹각채를 비롯하여 주하채(周河), 조어채, 전가채(田家), 낭성채(狼城), 불성와채(佛城渦), 이상채(李詳)의 7개채를 두었다. 지금의 바저우 시 신안진에 치소를 두었다. 보정군(保定軍)동하급주로 981년에 탁주 신진(新鎭)에 평융군(平戎軍)을 설치했다. 경덕 원년에 보정군으로 군명을 고쳤다. 경우 원년에 패주 문안현과 대성현의 2개현의 500호를 본군에 내속시켰다. 1125년(선화 7년)에 보정군을 현으로 격하시켜 막주에 소속시켰다. 그리고 현사에게 군사의 업무를 추가시켰다. 숭녕연간에는 1,029호 2,484명의 주민들이 살았다. 깁직물(絁)을 공납으로 바쳤다. 2개의 채를 도화채(桃花)와 부모채(父母) 2개의 채를 두었다. 이중 부모채는 1113년(정화 3년)에 안녕채(安寧)로 개명되었다. 지금의 바저우 시 서남쪽에 치소를 두었다. 금하간부금나라는 대명부에 대명부로를 신설했기 때문에 하북동로의 중심지를 하간부로 옮겼다. 1129년(금 태종 천회 7년) 총관부가 신설되었고 해릉양왕말년인 정륭연간에 차부(次府)가 더해졌으며 영주(瀛州)가 설치되었다. 영해군절도사(瀛海軍節度使)가 총관을 겸임했고 동시에 전운사(轉運司)가 파견되었다가 후에 총관부가 복구되었다. 꿰메지 않은 면, 소금, 골풀로 만든 돗자리, 마린화(馬藺花), 향부자, 전하해(錢蝦蟹), 말린 물고기가 생산되었고 31,691호 2현 3진을 관할했다.
여주(蠡州)하급주로 자사가 민정을 담당했다. 정강의 변직후에는 송나라가 설치한 영녕군을 그대로 유지했으나 1129년 영주(寧州) 박야군(博野郡), 박야군(博野軍)을 설치했다. 1151년(해릉양왕 천덕 3년) 지금의 이름으로 개명되었다. 29,997호 1현 1진을 관할했다.
막주하급주로 자사가 민정을 담당했다. 1214년(금 선종 정우 2년) 막정현(莫亭縣)으로 격하되었다. 22,933호 1현 1진을 거느렸다.
헌주(獻州)하급주로 자사가 민정을 담당했다. 1129년 악수현이 수주(壽州)로 분리되었다가 1151년 헌주로 개명되었다. 50,632호 2현 10진을 관할했다.
심주상급주로 자사가 민정을 맡았다. 요양군(饒陽郡)방어(防禦)를 반영하여 금나라초에 군(郡)으로 분리(刺)했다. 56,340호 5현 1진을 거느렸다.
청주중급주로 금나라초에는 송나라 건녕군을 그대로 설치했으나 1129년 방어를 파견했다. 47,875호 3현 1진을 관할했다.
창주상급주로 송대와 같이 매해군절도가 파견되었다. 104,774호 5현 11진을 거느렸다.
경주(景州)상급주로 자사가 파견되었다. 금나라초 영정군을 경주로 승격시켰고 1154년 본로로 내속되었다. 대안연간에 관주(觀州)로 개명되었다가 금 장종의 묘호로 인한 피휘문제로 경주로 개명했다. 65,828호 6현 4진을 관할했다.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