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주 위구르
감주 위구르(중국어: 甘州回鶻)는 894년 감주(장액) 일대에 수립된 위구르 왕국이다.[1][2] 튀르크어로는 칸수 위구르라고 부르기도 하며, 중국 측에서는 감주 회골 또는 하서 회골(중국어: 河西回鹘)이라고 불렀다. 감주 위구르를 통치한 카간은 야글라카르 씨족의 후예들이다.[3] 감주 위구르 지역의 위구르인들은 대부분 불교로 개종하였다.[4] 오늘날 간쑤성 일대인 중국과 서역을 이어주는 전통 교역로인 하서주랑 지역은 원래 서한금산국이 통치하던 곳이었으나 890년대 서한금산국 내부 혼란을 틈타 위구르인들이 에치나강을 따라 남하하였고, 이후 약 1세기 반 동안 하서주랑 동부는 감주 위구르가 점령하게 되었다. 11세기 초 서한금산국과 감주 위구르 모두 탕구트가 세운 서하의 공격으로 멸망하였다.[5] 역사하서회랑 일대에 위구르인이 거주한 시기는 최소 840년부터라고 본다.[6] 그러나 874년 토번의 잔존세력이 감주 지역에 있던 위구르를 몰아냈다.[7][8] 위구르인이 하서회랑에 다시 돌아온 것은 20년 뒤로, 894년 화이지안 카간이 이끄는 위구르인이 감주를 점령하고 감주 위구르를 수립했다.[7][9] 감주 위구르는 902년 당 소종에게 군사적 지원을 하기도 하고,[7] 912년 서한금산국을 공격하여 복종시키기도 하는 등 활발한 대외 정복활동을 펼쳐나갔다.[7] 924년 화이지안 카간이 병사한 뒤 감주 위구르에서 후계자를 둘러싼 내분이 있었으나, 디인이 승리하였고, 후당은 이들에게 지원을 약속했다.[10] 오대 십국 시기가 끝난 뒤, 961년 감주 위구르는 송나라의 제후국이 되기를 자처했다.[3] 그러나 송나라의 제후국이 된 이후, 감주 위구르는 주변 민족의 공격을 여러 차례 받았다. 1002년 탕구트 출신의 이계천이 영주를 점령한 뒤[11] 1003년 감주 위구르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3] 1008년과 1010년에는 요나라가 감주 위구르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3] 학자에 따라 감주 위구르의 멸망 시기에 이견이 있다.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에 따르면 1026년 탕구트가 감주를 함락하여 감주 위구르 왕국의 명맥이 끊어졌다고 하지만,[11] 울리히 테오발드에 따르면 감주 위구르는 1036년 탕구트인들에 병합되었고, 남은 위구르인들은 둔황과 과저우로 이주시켰다고 한다.[3] 종교감주 위구르에 거주하는 위구르인들은 원래 마니교를 믿었지만, 10세기 말 탕구트의 압박 이후 마니교를 버리고 불교로 개종했다. 탕구트인들처럼 감주 위구르인들도 우타이산으로 부처에게 참배를 하기 위해 떠났는데, 실제 목적은 요나라를 염탐하기 위한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12] 금나라에 사절로 파견되었던 송나라 외교관 홍호에 따르면, 13세기까지도 하서주랑의 위구르인들은 불교를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향1127년 훌라산 칸이 둔황 지역을 통치했다는 기록을 통해, 12세기에도 서하에 살던 위구르인들은 자치를 어느 정도 보장받았다고 볼 수 있다.[3] 둔황과 차이다무 분지 일대에 이주된 위구르인들은 황건 위구르라고 불렸다. 13세기 원대, 그리고 이후 명대에 살릭 위구르라고 불린 종족이 칭하이 지방에 거주했는데, 감주 위구르의 후예로 추정된다.[11] 오늘날 감주 위구르의 후예들은 위구족이라 불린다.[14] 같이 보기각주
|